Chapter 99
비올라는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순간 당황했다.
어떻게 대응하고 행동해야 할지 빠르게 생각해 봤다.
‘너무 똑똑한 척하면 안 돼. 그렇다고 너무 멍청해 보여도 안 되고, 적당한 그 선을 찾아야 하는데.’
하다못해 어린 헤라도 끔찍하리만치 무서운 계략 조연이다.
그런데 30대 후반의 농익을 대로 익은 계략가를 상대해야 한다니.
‘아냐. 그래도 할 만해.’
셀리나의 성격과 성향 등을 모조리 알고 있으니까.
셀리나는 작품 후반부에서 굉장히 많은 에피소드에 관여하며 비올라를 괴롭게 만드는 캐릭터다.
작품 속 셀리나는 비올라가 벨라투를 계승하면 안 된다고 판단을 내렸다.
「“비올라 벨라투는 지나치게 위험합니다. 결국 그녀의 검은 모나크를 향할 것입니다.”」
사실상 소설 후반부에서 비올라의 가장 위험하고 강력한 적은 바로 셀리나 대신이었다.
셀리나와 관련된 정보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셀리나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지.’
셀리나는 원래 황후가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비올라의 악랄한 계략 때문에 황후가 되지 못한다.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몸이래요, 폐하.”」
셀리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이는 황후 자격이 없어요.”」
“그렇지 않소. 내게 아이나 핏줄은 중요하지 않소. 내게는 그대뿐이요, 셀리다. 내 세상에는 오로지 당신뿐이니 당신이 아니면 나도 결혼하지 않겠소.”
그러나 셀리나의 생각은 완강했다.
「“그렇지 않아요. 모나크를 생각하세요. 제국을 위하여 넬라크의 혈육은 반드시 필요해요.”」
결국 셀리나는 황후가 되는 것을 포기하며 황제가 다른 여자와 혼인 할 것을 종용하게 된다.
매일 밤 몰래 울면서 말이다.
물론 셀리나만큼이나 넬라크도 고집이 센 편이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게 되지만 말이다.
‘셀리나를 그렇게 만든 건 비올라와 흑마법사 시독스였고.’
훗날 셀리나는 그 사실을 알고 비올라 벨라투에게 크게 분노하게 된다.
그리고 그 걷잡을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실수가 벌어져 비올라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매우 비중 있는 조연이었다.
“비올라 공녀?”
“아, 죄송합니다. 소문이 무성한 셀리나 대신님을 뵈니 눈이 부셔서 할말을 잃었네요.”
헤라의 몸이 움찔했다.
‘비올라가 저런 말도 할 줄 알았어?’
사실 헤라는 조금 걱정했다.
셀리나 앞에서도 목을 뻣뻣하게 들고 지나치게 무례하게 행동할 것을 걱정했으나 그건 기우였다.
“비올라 영애는 철혈의 공녀라던데 소문이 조금 와전된 모양이군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은 아니지요. 저는 지금 셀리나 대신님 앞에 서 있고, 셀리나 대신님 앞에서 철혈의 공녀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답니다.”
셀리나가 빙그레 웃었다.
“좋은 말이네요. 그래서, 제 제안의 어디가 이상한 건지 알 수 있을까요?”
비올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좋지도, 아주 나쁘지도 않은 적정선의 인상을 남기기 위해 머리를 세차게 회전시켰다.
“제가 멀리서 바라본 셀리나 대신님은 늘 모나크를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 무엇보다 모나크를 우선시하며, 모나크의 발전과 영광을 위해서라면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분이시지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그러려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답니다.”
비올라는 그녀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다.
표정과 눈빛.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손짓 하나하나가 우아했다.
기품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이라더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셀리나에게서는 벨라투와는 다른 종류의 기품과 위엄이 느껴졌다.
“그리고 귀족들의 화합과 협력을 매우 중시하는 분이라고 알고 있어요.”
“어째서 그렇게 알고 있나요?”
사실 이건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셀리나에 대한 평가였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고 비밀스러운 얘기도 아니었다.
그래서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말을 이을 수 있었다.
“골든 로드만 보더라도 그걸 알 수 있죠. 그간 벨라투와 겨울성은 중앙 권력으로부터는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왔어요. 물론 그게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에요. 벨라투 역시 중앙 권력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서로 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해요.”
“재미있는 얘기네요. 계속 들어볼게요.”
“그런데 셀리나 대신께서는 벨라투와 모나크를 잇는 무역 로드를 만들겠다고 하셨지요. 벨라투라는 거대한 칼이 모나크를 향할 수도 있는데 말이에요.”
헤라의 몸이 움찔했다.
저 말은 잘못 해석하면 역모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저는 그러한 용단을 내린 것을 보고 셀리나 대신님께서 화합과 협력을 우선시하신다는 것을 느꼈어요. 제가 본 셀리나 대신님은 그런 분이죠.”
“위험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고 제국 번영에 미쳐 있는 인간. 이 정도로 본 건가요?”
“사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쉽게 요약하면 제국에 미쳐 있는 유능한 책사.
이 정도로 볼 수 있었다.
“좋아요. 그래서 다음은요?”
“그런 분이 다른 곳도 아닌 물망초 연회에서 정치 세력을 이루고 파벌을 형성하라는 제안이 제게는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을 뿐이에요.”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요.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소년, 소녀들을 찾아보라는 내용이었지요.”
그럴 리가.
비올라는 그럴 리 없다고 판단했다.
‘더욱 적극적으로 세력을 형성하라는 주문이었잖아. 특별한 임무를 가진 사람을 찾고 뭉친다는 것을 명분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세력을 형성할 수 있을 테니까.’
속으로는 확신했지만 겉으로는 다르게 말했다.
“그렇다면 제 오해였네요. 죄송해요. 셀리나 대신님의 큰 뜻을 너무 좁은 눈으로 바라보았나 봐요.”
비올라는 남몰래 눈치를 보았다.
좋아.
이쯤에서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여 주자.
“셀리나 대신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조건과는 상관없이 특별한 사람을 찾으라고, 좋은 짝을 만난 분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해주시겠다고요.”
“그랬지요.”
“물망초 연회에서 제게 가장 특별한 사람은 이미 찾았거든요.”
비올라는 휠체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비올라의 시선이 헤라의 뒤통수를 향했다.
헤라의 몸이 살짝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제게 가장 특별한 사람은 제 언니예요.”
비올라는 내심 자신의 대답에 만족했다.
‘셀리나는 나한테 실망할 거야.’
셀리나는 분명 따뜻한 사람이지만 차가울 때는 그 누구보다 차가운 사람이었다.
어찌 됐든 지금은 정치 세력을 구축하고 파벌을 형성하는 전쟁 아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비올라는 그 전쟁을 회피하고 ‘내 가장 특별한 사람은 언니예요’라는 지극히 어린아이와 같은 사고를 보여주었다.
‘이런 경우 셀리나는 합리적이고 정치적인 계산을 해야 했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지금 똑똑한 척하지만 이상적인 꿈에 젖은 어린애처럼 보일 거야.’
소설 후반부에 나온 셀리나의 모습이라면 분명히 그랬다.
‘잘했어, 비올라. 나는 애송이야.’
애송이처럼 보였을 것이 확실했다.
나 아무래도 계략 여주인가 봐.
비올라는 오늘의 만남에 굉장히 만족했다.
*
셀리나 대신은 하이릴스 후작가로 돌아왔다.
어릴 때부터 줄곧 사용하던 그녀의 방에 들어서자 의문의 복면인이 한 명 보였다.
“당신!”
셀리나는 겁먹지 않았다.
복면을 썼다고 해도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보고 싶어서 몰래 찾아왔소.”
“황제로서 탈락이군요. 지금은 업무 시간 아닌가요?”
“나는 황제이기 전에 그대를 사랑하는 남자이기 때문이오.”
“낯간지러운 말도 많이 늘었고요. 조만간 장가와도 되겠어요.”
셀리나 눈에는 보였다.
복면 안으로 숨겨져 있지만 넬라크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을 것이다.
“우리 폐하 잘생긴 얼굴을 좀 볼까요?”
셀리나와 넬라크는 남몰래 담소를 나누었다.
“그래서, 비올라는 만나봤소?”
“네. 훌륭하고 바른 아이더군요.”
“표정이 굉장히 좋소.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인데.”
“네. 제 제안의 목적과 제가 던진 메시지를 너무나 명확하게 꿰뚫어보았어요.”
비올라가 들었다면 그거 아니라며 환장할 대답이었다.
“그대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소?”
“그 누구보다 내 옆의 소중한 사람을 먼저 돌아보자라는 것이었어요.”
비올라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다.
지금 시점의 셀리나와 소설 후반부 시점의 셀리나는 많이 달랐다.
비올라가 알고 있고 파악하고 있는 것은 소설 후반부의 셀리나였다.
셀리나는 소설을 통틀어 가장 극적인 성격 변화를 보이는 캐릭터 중 하나였다.
셀리나는 소설 후반부에 활약하는 조연이었고, 비올라가 파악할 수 있는 건 그 이후의 성격뿐이었다.
“제가 물망초 연회에서 설마 정말로 파벌을 형성하고 세력을 구축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겠어요?”
“다들 그런 줄로 알던데.”
“폐하도 절 그렇게 봤어요?”
셀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술도 살짝 앞으로 나온 것이, 검의 황제 넬라크는 일생일대의 위기감을 느끼고야 말았다.
“물론 난 아니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다들 그렇게 말하길래 그런 줄 알았다.
“제 숨은 뜻을 읽어낸 비올라 공녀가 그렇게 기특할 수 없어요. 언니를 향한 태도와 눈빛에서도 진정성이 느껴졌고요.”
“누군가를 이렇게 칭찬하는 건 오랜만에 보오.”
넬라크는 문득 자신도 셀리나에게 칭찬받고 싶다는 욕구가 뭉클 피어올랐다.
그렇지만 그는 위대한 검의 황제였고, 그 마음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사실 제 숨은 의도를 파악했다고 해도 물망초 연회에서 빠져나갈 필요까지는 없었잖아요. 비올라 공녀도 사실 물망초 연회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카를로 수석 디자이너를 만나 많은 것을 준비하였고, 입고 있는 연보라색 드레스는 난쟁이족의 명인 쿠룸쿠룸의 역작이었다.
“등장 이전부터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켰어요. 마치 이번 물망초 연회의 주인공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그랬던 그녀가 굳이 물망초 연회에서 빠져나가 헤라 공녀와 단둘이 시간을 보냈다는 건 이상하잖아요. 저한테 일종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봐요.”
셀리나는 비상한 머리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해 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보고 오해해 버렸다.
셀리나는 비올라를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적어도 열두 살 어린아이의 선택은 아니었다.
셀리나가 본 비올라는 인재(人材)였다.
“제게 이렇게 적극적인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셀리나의 눈과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훗날, 제국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 것 같아요. 정확히는 제국과 벨라투를 부흥시키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아직 더 두고 봐야 하지 않겠소?”
“동대륙에 유명한 격언이 있어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고 하더군요.”
“비올라가 될성부른 나무요?”
“그럴 것 같아요. 훗날 정식으로 스카우트해 볼 생각이에요. 제국을 위한 위대한 나무가 되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충분한 열정이 있는 아이였어요. 그 아이가 말하자면 입사 지원서를 내민 셈이고요. 아주아주 훌륭했어요. 뛰어난 꿈나무를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은데, 저 좀 안아주실래요?”
같은 시각. 방으로 돌아온 비올라는 괜스레 오싹해졌다.
‘왜 이렇게 춥냐?’
그리고 다시 하루가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