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6


칼튼은 순간 멍해졌다.

‘고, 공녀님!’

칼튼은 비올라가 저렇게까지 행동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칼튼이 본 비올라는 늘 치열했고 매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았다.

‘불리함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겠지요.’

비올라는 태생적인 불리함을 가지고 있다.

벨라투의 순혈이 아니며 나이가 너무 어리다.

후계 경쟁을 하기에는 너무나 나쁜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매번 최선을 다하며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것일 겁니다.’

이건 아니다.

비올라 공녀가 치열한 것은 알겠으나 치열함의 방향이 잘못되었다.

‘내가 개입하면 공작님께서 화를 내시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할 가치가 있을까?

비올라 공녀가 내게 중요한 사람인가?

내게 중요하진 않을 수 있지만 벨라투가에는 중요한 사람이다.

1초가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내가 개입하면 공작님은 화를 내실 거고, 어차피 상황도 종료되지 않아. 그러나 비올라 공녀에게 경종을 울릴 수는 있겠지.’

어차피 칼튼이 끼어든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은 없었다.

다만 칼튼이 끼어드는 행위 자체가 비올라에게 작은 경고 메시지를 줄 수는 있었다.

결정을 끝낸 칼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공녀님. 그 무슨 무례한 말씀이십니까?”

“칼튼. 네게 발언권을 준 적이 있던가?”

칼튼이 찔끔 놀랐다.

헤론의 기세가 느껴졌다.

헤론은 딱히 칼튼을 압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위압감이 느껴졌다.

칼튼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나가봐.”

칼튼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차피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그래도 이 행동만으로도 비올라에게는 충분한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칼튼은 문을 닫고 공작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칼튼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걱정이 되는구나.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저 어린 공녀가 부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부디 저 치열함이 독이 되어 돌아오지 않기를.’

*

헤론과 비올라. 그리고 퐁퐁이까지.

셋만 남게 된 집무실에서 헤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한테 사과를 요구했다. 맞느냐?”

“네. 맞아요.”

칼튼이 느낀 그 기분을 비올라도 똑같이 느꼈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딱히 날 압박하려는 게 아닌데…….’

그냥 존재 자체가 그랬다.

이건 작가가 설정한 설정값이며 헤론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존재 본연의 힘에 가까웠다.

‘숨을 못 쉬겠어.’

최대한 숨을 조절해 보려 했지만 마치 물속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지럽고 숨이 막혔다.

…음?’

그런데 어느 순간 숨을 쉬기가 편안해졌다.

헤론이 손을 쓴 것은 아니었다.

‘반지 때문인가?’

반지 덕분인 것 같았다.

반지는 생명수를 머금은 마거리트꽃밭이 통째로 들어가 있었고, 그것은 정령 친화력이 극대화된 비올라의 신체와 어우러져 외부의 기운을 중화시켜 주었다.

‘이런 게 된단 말이야?’

원래 벨라투의 그림자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 아티팩트였다.

그런데 이렇게나 큰 효능이 담겨 있었다.

‘외부의 기운이 중화된다는 건……

다른 것도 그렇다는 그렇겠지?’

이를테면 외부의 살기, 독기 등.

외부의 해로운 기운을 막아내 주는 힘을 가진 진귀한 아티팩트인 듯했다.

‘대박이다.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손에 넣었다.

‘이거 엄청 비쌀 거야.’

한편, 헤론은 비올라의 기색을 읽었다.

‘숨을 편히 쉬는군.’

보통의 아이들은 헤론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몇몇은 기절하기도 했다.

헤론은 일부러 상대를 압박하는 기세를 내뿜는 건 아니었지만, 또 일부러 그 기세를 조절해 주지도 않았다.

인위적인 조절 없이 자연스레 상대를 만나왔다.

내게 사과를 요구하며 많이 긴장했을 터인데.”

헤론은 마냥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숨을 저토록 편안히 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저 앙큼한 입양 딸이 무슨 말을 할지, 조금은 기대가 되기도 했다.

“이 아이는 제 권속이에요. 이름은 퐁퐁이라고 지었어요.”

“그런데?”

“제 권속인 아이가 마거리트 꽃들에게 늠름이라는 이름을 주었어요.”

“……”

이름을 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벨라투를 비롯한 권세 높은 가문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 순간, 마거리트 꽃밭은 제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곳이 되었어요.

제 권속이 이름을 주었으니까.”

“그런데 지키지 못했구나.”

이름은 함부로 주는 것이 아니다.

벨라투라면 더더욱.

“지키지 못했죠. 왜냐하면 저는 아버지께서 마거리트 꽃밭을 없애 버릴 줄은 몰랐거든요.”

“하얀 벨라투로서 실격이란 얘기를 하고 싶은 거냐?”

“아니요. 제게 하나뿐인 아버지마저도 신뢰하면 안 되는 곳이 벨라투라는 것을 배웠어요.”

비올라는 당당했다.

“저는 어려요. 실수해도 괜찮은 나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번에 실수했어요. 남들을 모두 의심해야만 하는데 아버지를 의심하지 않았어요.”

헤론의 몸이 아주 작게 움찔했다.

그 누구도 그 움찔거림을 알아채지 못했다.

“왜냐하면…… 저는 아버지를 저의 어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시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저와 저의 것을 망가뜨리지는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나 봐요.”

헤론은 무표정으로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화를 내야 하는데 화가 나지 않는다.

벨라투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하는데 비올라의 말들이 귓가를 쉴 새 없이 어지럽혔다.

헤론 벨라투는 자식에게서 처음 이런 감정을 느껴보았다.

“아마 아버지께서는 모든 걸 다 알고 계셨을 거예요. 제가 퐁퐁이에게 이름을 준 것도, 그리고 퐁퐁이가 마거리트 꽃들에게 또 이름을 주며 기른 것까지도.”

그건 아니었다.

헤론은 공작저 내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을 알고 있지만 퐁퐁이가 물을 준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일일이 신경 써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고 헤론도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몰랐다’ 라고 얘기할 수도 없었다.

가주로서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고 또 왠지 아버지로서도 몰랐다고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다 알고 계시는 아버지께서 굳이 마거리트 꽃밭을 모조리 없애 버리셨죠.”

그건 마거리트 꽃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비올라에게 마거리트 꽃밭을 통째로 선물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고서 그것을 제게 선물로 주셨어요. 제 권속이 이름을 준 생명들이었는데 말이에요. 이게 저를 모욕하는 행위가 아니면 뭔가요?”

비올라의 눈빛은 단호했다.

마치 ‘아버지는 다 알고 있었잖아요. 몰랐으면 이렇게 안 했겠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반지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냐?”

“……”

비올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저는 화가 났어요. 이 반지는 분명 저를 모욕하는 반지인데.

분명 모멸감을 느껴야만 하는 건데.”

물론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이 아티팩트는 지금 당장 시중에 내놓아도 최소 수억 달리아 이상의 가치를 가질 것이다.

천살 공작과 쿠룸쿠룸의 합작품이라니.

수억 달리아가 아니라 수십억 달리 아쯤 할지도 모른다.

노후를 확실하고 든든하게 챙겨줄 훌륭한 보험이었다.

자본주의의 맛을 잔뜩 본 비올라의 정신은 모멸감 따위는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근데 기뻤어요.”

진심이었다.

자본주의 정신이 가지는 진심.

그리고 이 진심은 공작의 ‘진안’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서 화가 났어요. 아버지께서 저를 모욕하신 행위가, 저에게는 기쁨이 된 이 모순이 치욕스럽고 화가 나요.”

비올라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꽃밭이었어요.”

당연하다.

누가 꽃밭을 선물로 받겠는가.

그것도 수천만 송이를..

“그리고 꽃밭을 선물해 준 사람이, 제가 그토록 바라왔던 아버지예요.”

그토록 바라왔던 아버지라는 말이 헤론의 귀가 아닌 심장에 꽂혔다.

그러나 겉으로는 냉담함을 유지했다.

“하얀 벨라투로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구나.”

“그 부분은 죄송해요. 앞으로 나아진 모습을 보일게요.”

헤론은 어린아이들에게는 관대하다.

비올라는 그 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잘못한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개선을 약속하는 아이에게는 더 더욱 관대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비올라는 당당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아진 모습을 보일 건지 말해보거라.”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을게요.”

순간, 헤론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마저도 의심하고, 제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게요. 그것이 하얀 벨라투가 걸어 나가야 할 길이자 숙명이라면 인정하고 받아들일게요.”

헤론은 어딘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가슴을 하늘로 비유한다면 하늘 저편 어딘가에 먹구름이 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삶은 무척이나 외롭겠지요.”

비올라의 눈이 헤론을 향했다.

“제 아버지처럼.”

*

비올라는 거의 스무 시간 가까이 잠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오래 자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만큼 헤론과의 대화에 모든 심력을 다 쏟아부었다.

스무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눈을 떴다.

‘와…… 결국 해냈네.’

퐁퐁이가 사고를 친 시점에서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그런데 그 수습이 나름대로 잘된 것 같았다.

‘너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구나. 그 부분에 대하여 사과하마.

벨라투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아마 총집사 칼튼도 이 상황을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비올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기뻤다는 말은 진심이에요. 저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했어요.

꽃밭을 선물해 준 아버지라니. 로맨틱했어요.

이후 방으로 돌아와 스무 시간을 잤다.

그러고서 또 며칠이 흘렀다.

‘곧 물망초 연회가 열려.

사교계 데뷔가 며칠 남지 않았다.

그런데 소설 속과는 조금 다른 소문들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공녀님. 제르미 공자가 이번 물망초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하는데요?”

“제르미가?”

“네. 이상한 일이네요. 제르미 공자는 사교 모임을 싫어한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에요.”

제르미는 원래 공식적으로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는 인물이다.

내용이 바뀌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약간 불길했다.

“이번 연회 주최자 말인데요.”

〈벨라투의 그림자> 속에서는 퀴리 아 남작이 주관하여 열게 되어 있었다.

퀴리아 남작은 소설 속에서 별로 비중이 없는 인물로 사교 모임을 즐기는 사치스러운 귀족이라는 설명만 짤막하게 존재했었다.

“하이릴스 후작가에서 주관한다고 해요.”

“하이릴스 후작가?”

비올라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하이릴스 후작가가 왜 여기서 나와?’

하이릴스 후작가.

제국의 2인자이자 곧 황후가 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할 셀리나 대신의 가문이었다.

‘제르미에 셀리나 대신까지………?’

뭔가가 아주 많이 바뀌어 버렸다.

덕분에 아주 잠깐 사교계를 뜨겁게 달궜던 ‘비올라 벨라투 영애’의 화제성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물망초 연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