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5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85화

세르폰 입장에서야 어떨지 몰라도 에르사는 화가 났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저 말이 헤라를 비하하는 말은 분명했다.

비올라가 휠체어를 밀고 있는 에르사의 손을 가만히 덮었다.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살살 저었다.

‘비올라 공녀님?’

얼떨결에 손을 내어준 에르사는 결국 침묵했다.

대신 크롬슨이 말했다.

“휠체어에 부양 마법을 거는 것과 사람의 몸에 부양 마법을 거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만…….”

사물에 거는 것보다 사람에게 거는 것이 훨씬 힘들다.

그래서 사람에게 마법을 걸려면 더 큰 비용이 든다.

에르사와 눈을 마주친 크롬슨이 흠칫 놀랐다.

“그렇지만은……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헤헤.”

헤라가 아공간에서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이건 보수. 마법사. 당신은 이제 돌아가도 좋아.”

“다음에 또 애용해 주십시오!”

가죽 주머니를 받아 든 크롬슨이 비굴하게 웃었다.

보통의 자존심 강한 마법사들과는 조금 다른 모양새였지만 크롬슨은 개의치 않았다.

‘두둑하다!’

무시무시한 에르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데다가, 이토록 묵직한 보수를 받았으니 미련은 없었다.

“저는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앞으로도 행복하고 평안한 여정 되십시오!”

그리고 몸을 돌려 곧바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비올라는 계속 궁금했다.

‘헤라 언니가 꾸미는 게 뭐지?’

사실 헤라라면 마탑에서 정식으로 마법사를 초빙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헤라는 테라 상단의 실질적 주인이니까.

‘애초에 크롬슨을 고용한 것부터가 헤라 언니의 큰 그림 아닐까?’

순간 비올라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그것까지 설계된 것이려고.

‘아니겠지?’

헤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루이바르텐가의 손님인데, 이런 휠체어를 타고 가는 것은 모양새가 아름답지 못하겠네요.”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다.”

“뭘요. 다만, 제게 이 휠체어를 제작해 주신 분께서 조금 서글프겠어요. 위대한 골드 로드를 지나치는 기회를 얻지 못하다니.”

“그분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세르폰의 표정에는 골드 로드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계속 에르사 쪽을 쳐다보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에르사가 헤라를 업는 것이 보였다.

‘저런’ 세르폰은 저 모습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옆에 건장한 남성 집사도 있는데 굳이 에르사가 업어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저 벨라투라는 집안을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는 새어 나오는 속마음을 겨우 감춘 채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골드 로드는 실버 로드에 비해 훨씬 더 한산했다.

실버 로드에서 3일을 기다려야 입성할 수 있다면, 골드 로드는 약 5분 정도의 수속 시간만 있으면 입장할 수 있었다.

‘아. 피곤하다’ 여기까지 오면서 너무 많은 시선을 받았다.

억지로 무시하면서 왔지만 아무튼 진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헤라가 말했다.

“역시 내 동생이네.”

“뭐가?”

“실버 로드의 찌끄래기들의 시선 따위는 고고하게 무시해 버리는 벨라투의 기개란.”

·내가? 언제?

그냥 부담스러워서 눈 안 마주친 거라고!

“본래 골드 로드를 통과하는 VIP들은 실버 로드의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간단한 눈인사 정도는 해주잖아.”

“근데 그냥 차갑게 무시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

“…….?”

“보기 좋았다는 뜻이야.”

비올라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런 내용은 소설 속에서도 본 적없고 작가의 설정집에서도 읽은 적없었다.

‘젠장. 몰랐어!’

비올라의 시선을 통해 전개되는 〈벨라투의 그림자) 내에서 ‘파르아자작령’과 관련된 언급은 거의 없었다.

검은 벨라투로 성장하는 비올라와 명품의 대명사인 파르아 자작령은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어딘지 망한 기분이 들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문이 보였다.

비올라 일행은 골드 게이트를 지나 파르아 자작령에 입성했다.

“골드 로드를 지나면 곧바로 이곳의 메인 로드인 명인의 길. 마스터로드가 보일 겁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비올라는 벌어지려는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굉장히 잘 닦이고 쾌적한 길이 보였고, 길 양옆으로 화려한 명품 브랜드 상점이 즐비했다.

세상의 모든 명품이 생산되는 파르아 자작령다운 면모였다.

“그리고 마스터 로드의 중앙 부근.

로열 존이라 불리는 그곳에 저희 가문의 본점이 있습니다.”

중앙부로 가면 갈수록 더 이름값이 높은 명가 브랜드의 상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루이바르텐 상점.]

3층짜리 화려한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비올라는 결국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헐………?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고?

이 명품 상점에?’

비올라는 깜짝 놀랐다.

파르아 자작령까지 올라왔다는 것 자체가 일정 수준 이상의 부 혹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더더군다나 파르아 자작령에 방문하는 자제들 사이에는 본인이 힘이 있어도 일부러 가마꾼이나 마법사 등을 고용하는 경우도 많다.

수행원 자체가 부와 권력을 보여주는 장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곳에 있다는 것은 일정수준 이상의 부자 혹은 권력가라는 뜻이 되었다.

‘그런 부자들이 바글바글하네.’

세상에 부자가 이렇게 많구나.

벨라투 공작가 내에 있을 때는 크게 체감하지 못했었다.

벨라투가도 부자 가문인 것은 맞지만 ‘부’ 보다는 ‘무력’에 치중한 가문이었으니까.

굳이 검소하게 살지는 않지만 반대로 또 굳이 사치하지도 않는 가문이었다.

때문에 벨라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힘은 있지만 부는 없는 가문이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여기는 옷 하나에 백만 달리아가 넘는다고 했는데.’

신발 하나가 백만 달리아.

옷 하나가 수백만 달리아.

가방 하나가 수백만 달리아.

코트 하나는 천만 달리아.

검집이나 활 하나가 수천만 달리아를 호가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비싼 명품을 파는 곳인데도 줄이 이렇게나 길었다.

수행원들을 포함하여 최소 마흔 명 이상이 줄 서 있었다.

루이바르텐가의 명품 상점을 이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세르폰은 그 많은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세르폰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는 내내 비올라는 등이 따가웠다.

실버 로드에서 있었던 일과 비슷한 일이 이곳에서도 벌어졌다.

‘벨라투는 명품을 멀리하는 가문 아니었나요?’

‘어떻게 루이바르텐가의 VIP로 대우받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곳에서는 살이 조금 더해졌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사람들일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특히 저 어린 영애의 기묘한 분위기가 신비로워요.’

‘사람을 많이 해친 사람 특유의 살벌한 기운이 있어서 그럴 거예요.’

‘정말요?’

‘벨라투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소 100명 이상을 죽여야 한대요.’

‘어쩜 그렇게 야만스러울 수가!’

비올라는 외치고 싶었다.

아니다!

그건 다 괴소문이다!

소문이 와전된 것이다!!

‘……라고 하기에는 내 바로 위에 비첸이 있지.’

비첸은 살인귀가 맞았고, 벨라투가의 사람들이 살인을 거리낌 없이 제지르기는 한다.

물론 명분이 있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으. 불편해.’

아까보다 더했다.

골드 로드로 입장할 때보다 더한 시선이 느껴졌다.

루이바르텐가는 파르아 자작령 내에 있는 수많은 명가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명가 중 하나였다.

이곳에 더 많은 사람이 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와서 살포시 웃음 짓고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이상하지?’

줄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뒤로한 채, 비올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세르폰이 에르사에게 말을 걸었다.

“레이디께서는 혹여 평소 가지고 싶었던 물건이 있으실까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굳이 변명을 덧붙였다.

“벨라투가의 공녀님들이야 제가 주제넘게 참견할 바가 못 되고, 대신 아름다운 레이디께 제 작은 정성을 표하고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없습니다.”

에르사가 짧게 대답했다.

에르사는 명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녀는 아름다운 옷보다는 실용적인 옷이 좋고, 예쁜 장신구보다는 날카로운 검이 좋은 사람이었다.

물론 루이바르텐가에서도 명검을 제련하기는 했지만 그건 성능에 비해 지나치리만큼 비쌌다.

“그래도 저희 상점에 들어가시면 혹여 더욱 크게 반짝거리는 것이 보일 수 있습니다. 마치 운명처럼 크게 다가온다고 하더군요. 마치 저희처럼요.”

세르폰은 여유롭게 웃었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에르사 경.’ 아름다운 잡화들, 보석들을 보면 반드시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벨라투의 야만스러운 자들은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구경조차 하지 못하게 했겠지요.’ 벨라투 본인들조차 명품을 알아볼 안목이 없으니, 그곳에 속한 집사들이야 오죽하랴.

‘제가 반드시 에르사 경 마음속에 깊이 숨겨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을 끄집어 내드리겠습니다.’

에르사가 대답했다.

“필요하면 제가 구입하겠습니다, 세르폰 공자님.”

“저희 가문의 물건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과분할 정도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값보다 많이 비싸다.

집사 정도의 월급으로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다.

그러니 이 비싼 것을 선물해 주겠다라는 뜻이었다.

“그 사랑을 전달해 드리고 싶어요.

에르사 경은 그러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자격이요?”

“네. 에르사 경은 새벽의 별보다 더 아름다우시니까.”

에르사는 비올라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대충 대답해 주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

비올라 일행은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아내며 귀빈 전용 입구를 통해 상점에 들어섰다.

도착하자마자 비올라는 황당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