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6
비올라는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피투성이가 된 툰드라를 보니 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응급실에서의 기억. 강한준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그 기억은 비올라에게 있어서 크나큰 트라우마였다.
“근데.” 패닉에 빠져들기 직전, 퐁퐁이의 말이 이어졌다. “가짜 피잖아?”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피와 똑같지만 묘하게 달랐다. 툰드라의 피 냄새를 맡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캐릭터 비올라의 본성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무언가가 없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 피?’ 가짜 피를 왜 뒤집어쓰고 있을까. 이토록 정교한 피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가짜라는 걸 모르고 맡아보면 혈향도 진짜야.’ 만약 퐁퐁이가 물의 정령이 아니었다면 가짜 피라는 것을 구별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퐁퐁이마저도 잠깐이나마 진짜 피로 착각했을 정도다.
비올라가 쓰러진 툰드라 앞에 섰다. “툰드라. 고개 들어.” 툰드라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려왔다. 고개를 들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마치…… 가위 눌린 것 같아.’ 툰드라의 의식은 몸을 계속 움직이려고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안간힘을 끌어내는 듯 툰드라에게서 꼭꼭대는 신음성이 들려왔다. “됐으니까 힘 빼.” 툰드라의 몸이 축-늘어졌다. 비올라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피. 툰드라의 몸을 반쯤 지배할 만한 실력자. 이런 실력을 가진 자가 공작저에 둘이나 있던가?”
공작저에 딱 한 명 있다. 인형술사 세이반 마르코스. “내가 알기로는 한 명밖에 없어. 세이반.” 그가 아니라면 이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다. “힉슨 경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힉슨이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힉슨이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이런 일을 허락했을 리는 없다.
‘힉슨 아저씨는 내가 놀라는 걸 바라지 않아.’ 비올라에게 있어서 힉슨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비록 행동이 경박하고 언행이 경솔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힉슨은 늘 좋은 어른이 되어주기 위해 노력해 왔다. 비올라는 그 노력을 잘 알고 있고 힉슨이 이런 일에 동의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힉슨 경이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거고, 그건 곧 그럴싸한 명분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세이반 마르코스는 헤론 공작의 측근이다. “내 아버지의 명령이 있었니?”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세이반 마르코스였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붉은 정장과 갈색 구두가 보였다. 단발머리에 연한 화장을 하고 있는 그가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6공녀. 비올라 아가씨를 뵙습니다.” “내 개를 이용해서 나를 흔들어보라는 명령을 받은 거야?” 비올라는 말을 하면서도 등골이 오싹했다. ‘잠시 방심할 뻔했네.’ 이곳이 ‘벨라투가(家)‘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끊임없이 후계자에 대한 시험이 이 어지는 살벌한 곳. 만약 가짜 피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경거망동했거나 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벨라투를 약화시키는 외부의 약점이라면 제거하는 것이 맞겠지’.
소설 속 헤론 벨라투 공작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툰드라는 현재 비올라의 ‘개’고, 개주제에 벨라투를 흔든다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맞으니까. 물론 비올라에게도 큰 오점이 될테고, “대답 안 할 거야?” “음. 죄송합니다. 대답을 하긴 해야 하는데, 어디까지 솔직하게 대답을 해드려야 하나…… 하고 고민 중이었어요.” 약간 고민하던 세이반이 입을 열었다. “사실 공작님의 명령이 아니고요. 이사벨라 공작 부인께서 내리신 명령이랍니다.” “어머니께서?” “네. 공녀님께서 개에게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확인이라고 하지만 결국 약점을 움켜쥐겠다는 소리였다. 비올라는 또다시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사벨라 앞에서 툰드라를 아끼는 모양새를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툰드라와 세이반을 이용해서 이런 짓을 꾸몄다. 과연 이사벨라였다. “전혀 동요하지 않으셨지만 말이에요.” 세이반이 재미있다는 듯 호호 웃었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는데, 신기하네요.” “…….” 비올라는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비올라는 분명히 동요했다. 퐁퐁이가 가짜 피라는 사실을 말해 주기 전,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었다. ‘세이반이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지금의 세이반은 툰드라의 의식을 지배하여 조종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다. 현재의 툰드라는 소폭풍 제르미, 5공자 비첸과도 거의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무인(武人)으로 성장 중이고. 다시 말해 세이반은 반쯤은 일부러 모른 체해주고 있다는 소리였다. ‘퐁퐁이는 눈에 안 보이는 것 같고.’ 세이반의 눈에 퐁퐁이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정령들은 계약되지 않은 인간들에게서 몸을 숨길 수 있다고도 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비올라는 등을 돌려 의자 앞으로 걸어갔다. 사뿐사뿐 걸어 의자 위에 앉은 채 다리를 꼬았다. “세이반. 네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게 뭐야?” “호호.” 세이반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오른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눈을 가늘게 뜨고 비올라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역시 비올라 공녀께서는 눈치가 빠르시네요. 원래 저는 지령을 받은 것을 비밀로 해야 했거든요.”
이사벨라의 은밀한 시험. 그 내용을 다 말하면 안 되었다. 그런데 비올라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이 명령을 내린 사람이 이사벨라라는 사실까지도. “계속 말해봐.” “그런데 이사벨라 공작 부인보다 비올라 공녀께 더 신임을 받고 싶어졌지 뭐예요?” “이유는?” “그냥. 감이요.” 현재의 이사벨라와 현재의 비올라를 감히 비교할 수는 없다. 이사벨다는 여태껏 벨라투의 안주인으로서 그 힘과 세력을 키워왔다. 게다가 그녀의 친정은 창(槍)의 명가 퀼튼가(家)다. “그리고 그냥 그러고 싶어요.” 비올라는 조금 헷갈렸다. 세이반 마르코스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그냥 떠보는 말인지 속단하기 어려웠다. “저라는 사람을 제대로 봐주신 분이 일곱 살의 비올라 벨라투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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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라는 세이반을 완벽하게 믿지 않았다. 이곳은 벨라투이며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 믿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 그래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하네.” 아주 싫지는 않았다. <벨라투의 그림자>속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그렇듯 세이반 마르코스도 그리 행복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내 걸 함부로 건드린 것에 대한 대가는 어떻게 치를 생각이야?” “글쎄요.” 어느덧 툰드라는 정신을 차렸다. 비올라를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에 머리가 아찔해질 지경이었지만 일단 참았다. ‘경거망동하면 안 돼.’ 세이반에게 지배당해서 이상한 짓을 저질렀다. 힉슨까지 동의한 일이라지만, 그래도 자신은 그러면 안 됐다. ‘아무리 상대가 강자여도……… 나는 제압당했어.’ 그것은 반려견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종당하느니 차라리 콱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따가 문책하시겠지.”
툰드라는 꼬리를 축 늘어뜨린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벽면에 기대선 채 대기했다. “저는 이사벨라 공작 부인께 명령을 받았을 뿐인데요.” “그건 사실이지. 그렇지만 네가 내 것을 건드렸다는 것도 사실이고.” 비올라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고고한 태도로 서서 세이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머니께 가야겠네.” “가서 어쩌시려고요?” “내 것을 건드린 것에 정식으로 항의해야지.” “그러면 제가 일러바친 꼴이 되는데요?” “감수하려던 것 아니었어?”
비올라가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세이반이 황급히 문을 막아섰다. “공녀님. 제가 열심히 일해서 대가를 치를게요.” “그러니까. 어떻게?” 비올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올라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본 세이반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하얀 벨라투의 거미줄에 걸린 것 같네.’ 표정을 보아하니 비올라는 애초에 이사벨라에게 갈 생각이 전혀 없었던 듯했다. 이사벨라에게 가겠다는 건은 그냥 엄포였다. 엄포를 놓은 채 빠져나갈 수 없는 거미줄을 사방에 쳐놓고서 세이반에게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다. ‘아아. 저 여유로운 표정. 애티튜드, 분위기.’ 세이반 마르코스가 생각하는 벨라투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소녀였다. 과연 철혈의 공녀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곧 사교계에 입문하실 테니. 사교계와 관련된 모든 일정을 제게 맡겨 주시렵니까? 에스코트도 제가 하면 더 좋고요.” “그건 제논의 일인데.” “제논은 손가락이 불편해서 마차를 인솔할 때라든가, 에스코트할 때는 불리할지 몰라요. 그리고… 사교계에서는 제논의 손가락을 두고 씹어댈 수도 있어요.” “씹어대?” “네. 흠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미친 녀석들이 분명 있을걸요?”
비올라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장애가 흠이 된다’ 라는 귀족들의 덜떨어진 사고방식이 기분이 무척 나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빙그레 웃던 제논의 얼굴이 떠올라 버렸다. 그때의 제논은 얄밉기까지 했다. ‘아무튼 못 말린다니까.’ 아무리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고 잘린 손가락도 감쪽같이 붙일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얼마나 아팠을까?’ 처음에 제논이 스스로 손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얘기했을 때, 비올라는 화가 나는 한편 가슴이 아팠다. 제논이 왜 그렇게까지 행동했는지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내 허락 없이 네 몸을 다치게 하지 마. 절대로.’ ‘화내시는 건가요?’ ‘그래.’ ‘기쁜 듯 슬픈 듯 기쁘네요.’
제논은 비올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집사, 제논입니다’ 라며 허리를 숙였는데 비올라는 그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려다 말았다. 세이반의 말이 들려왔다. “대외적인 거긴 하지만 제논은 수배령이 떨어진 자니까요. 제가 돕는 편이 모양새가 좋지 않을까요? 저는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화장술사기도 하잖아요.” 세이반 마르코스는 문을 닫고 복도를 걸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창밖 검은 하늘에 푸른 달이 보였다. “누구보다 벨라투다운 벨라투. 그러한 벨라투를 만들어 드릴게요. “물망초 연회의 가장 아름다운 주인공은 공녀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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툰드라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자연재해 같은 거였어.”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사주했고, 그 말은 곧 공작도 허가했다는 얘기다. 세이반 마르코스는 툰드라 입장에서는 불가항력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제가 더 노력했어야 했는 데….” 툰드라는 분한 것 같았다. 툰드라에게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듯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뭐가?” “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셔서……… 기뻤어요.” 그 순간, 툰드라는 뛸 듯이 기뻤다. 비올라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 그것을 증명받은 것 같아 기뻤다. “공녀님께 어울리는 반려견이 되도록 더 노력할게요.” 그러다가 갑자기 이를 바드득 갈더니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는지 가짜피가 전혀 물들지 않은 상태였다. “이건 뭐야?” “제르미가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편지였다. 툰드라는 제르미가 비올라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비올라는 편지를 뜯어보았다. [내가 에스코트해도 괜찮을까?] 비올라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제르미에게 에스코트를 받는다? 전 세계 모든 영애를 적으로 돌리겠다. 는 소리다. 비올라는 요란한 데뷔탕트를 원하지 않았다. 사교계에서는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해.’
원작 속 비올라는 그곳에서 제 맘에 들지 않는 영애들의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 버리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 덕분에 사교계에서는 완전히 배척받게 된다. 그게 원작 속 비올라가 원하는 바였다. ‘원작 속 비올라는 사교계를 완전히 멀리했어.’ 그래서 원작 속에는 사교계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다르게 가야겠지.’ 목숨을 보장받기 위해 ‘하얀 벨라 투’를 선택했고 하얀 벨라투가 되었다면 응당 사교계에 입문하여 정치적인 힘을 쌓아야만 한다.
비올라가 편지를 북북 찢었다. “툰드라.” “네.” 어쩐 일인지 툰드라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갖다 버려.” 툰드라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밝은 웃음이었다. 비올라는 그 웃음을 똑바로 마주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웃지 마.’ 강한준은 가끔 저토록 밝게 웃었다. 한아린이 강한준을 좋아하게 된 것도 저 환한 웃음 때문이었다. “나가봐.” “네.” 툰드라는 굉장히 가벼운 발걸음으로 몸을 돌려 나갔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이제야 좀 쉬겠네.” 벌써 밤 12시다. 열두 살의 육체에게는 굉장히 늦은 시간이었다. 폭신한 침대에 몸을 맡겼다. ‘응? 이제야 좀 쉬는가 싶었는데, 세상 사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