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2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72화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삼켰다.

뭐야, 이 언니. 박력 터져.

솔직한 말로 외치고 싶었다.

날 가져요, 언니. 엉엉.

“네 집사를 죽여줄게.”

그때, 제논의 몸이 움찔했다.

비올라가 우연히 그 모습을 발견했다.

‘어?’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원래 제논은 방심했어.’

정령 왕급에 해당하는 블러드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방심한 탓에 정신을 빼앗겼다.

근데 그건 반대도 마찬가지잖아?’

블러드 입장에서도 그건 똑같았다.

너무 쉽게 제논을 장악한 블러드도 방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논은 블러드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자다.

‘메데이아 언니의 존재감과 살기 때문에…… 약간의 균열이 생겼을 거야.’

그리고 그 아주 작은 균열만으로도, 제논은 가짜 의식 세계를 부숴버릴 수 있는 강한 의지와 힘을 가진 등장인물이었다.

“내 동생.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고 있을까?”

“언니.”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주 약간의 시간만 허락된다면, 제논은 스스로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응?”

“저를 도와주시려는 그 마음은 감사해요.”

메데이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동생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졌다.

태도를 보아하니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언니가 지켜보셨는지는 모르겠어요.”

“네가 저 아이를 소환했던 시점부터.”

푸른 머리카락의 소년.

퐁퐁이는 메데이아와 일부러 눈을 마주쳤다.

눈을 피하면 왠지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랬다.

반대로 말하면 눈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다.

정작 메데이아는 아무 생각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언니는 보셨을 거예요.”

비올라는 은근슬쩍 제논의 눈치를 살폈다.

제논이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논이 의식을 되찾아가고 있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아마 정신 세계 속에서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겠지.

“저는 제대로 움직인 적이 없어요.

언니도 보셨죠?”

“생각해 보니 그건 그렇구나.”

“그건 제가 하얀 벨라투이기 때문이에요.”

사실 반응하지 못해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어찌 됐든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저는 하얀 벨라투로서의 제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고, 따라서 최후에 최후의 순간까지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르지 않았어요. 제가 제대로 싸우는 순간, 제 하얀 벨라투로서의 가치가 훼손되니까요.”

메데이아는 흐음, 하고 턱을 살짝 매만졌다.

메데이아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하얀 벨라투라서 움직이지 않았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이지만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기도 했다.

“네가 검은 벨라투였다고 해도 자연재해와 맞서 싸울 수는 없어.”

메데이아는 지금의 비올라와 제논사이의 실력 차를 직시했다.

동생이 열두 살의 나이치고 대단한 게 맞기는 하지만 정신을 잃은 제논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는 제 집사를 믿었거든요. 지금도 믿고 있고.”

“…응?”

메데이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올라의 몸 여기저기에 난 작은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벨라투의 집사가 벨라투의 후계자 후보를 다치게 만들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문책감이다.

어쩌면 목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믿는다고?’

메데이아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제논이 비올라를 공격한 순간, 그 어떤 이유를 참작하더라도 집사의 자격을 잃었다.

믿음받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믿는다니?’

메데이아가 보는 비올라는 철혈의 공녀가 맞았다.

환영 만찬회에서부터 지금까지 보여주는 모든 모습이 그러했다.

그런데 그 비올라의 입에서 ‘믿는다’ 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제가 움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비올라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집사를 시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까딱 잘못하면 네가 죽을 수도 있는데?”

“그것 또한 제 선택이지요.”

물론 죽을 생각 따윈 전혀 없다.

죽고 싶지 않고 꿀 빨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메데이아에게는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제 집사라면, 충분히 정신 제약으로부터 풀려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 믿었거든요.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비올라는 제논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제논, 일어나서 네가 섬기는 자를 똑바로 봐.”

*

제논의 흐릿한 의식 속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제 집사를 믿었거든요. 지금도 믿고 있고.”

“제 집사라면, 충분히 정신 제약으로부터 풀려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 믿었거든요.”

눈앞이 밝아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제논. 일어나서 네가 섬기는 자를 똑바로 봐.”

자신의 정신을 좀먹던 외부의 무엇인가를 몰아냈다.

이윽고 모든 것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논은 얼굴을 굳힌 채 비올라 앞으로 다가섰다.

제르미가 검을 잡고 막아서려 했지만 비올라가 손을 들어 올렸다.

“괜찮아.”

제논은 이미 정신을 차렸다.

제논이 비올라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공녀님, 제 죄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요?”

“목숨으로 갚아.”

“알겠습니다.”

제논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도를 들어 올려 목을 찔렀다.

챙!

쇠붙이와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메데이아가 제논의 단도를 쳐냈다.

“자결하라는 뜻이 아닌 것 같은데, 집사.”

제논을 향해 존대하던 메데이아는 이제 없었다.

제논을 바라보는 메데이아의 눈빛은 그야말로 하얀 삭풍의 눈빛이었다.

감정 없이 메마른, 약간의 혐오감마저도 묻어 있는 눈빛.

제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너무 상심하여 감정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세요. 이 죗값은 평생 공녀님을 모시며 갚아가겠습니다.”

제논의 귀에 비올라의 목소리가 자꾸 아른거렸다.

믿는다.

지금도 믿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저 믿음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인가?

‘나는 과연 좋은 집사인가?’

일부러 정령에게 의식을 빼앗긴 뒤 비올라를 시험하려고 했다.

비올라의 능력이 어느 정도로 성장했는지.

얼마만큼 예리하고 날카로운 단도 술을 보여줄 수 있는지.

그게 보고 싶었다.

““네가 정령에게 의지를 빼앗길 정도의 하찮은 사람이었어?”

비올라는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제논이 일부러 정신을 내어주었다.

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짚었다.

제논은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메데이아는 메마른 눈으로 무릎 꿇은 제논을 향해 말했다.

“비올라는 아무래도 집사를 용서할 생각인 것 같아.”

메데이아가 대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나는 용서가 잘 안 되네.”

비올라의 피부에 새겨진 얕은 상처들이, 이상하게도 깊은 상처처럼 보였다.

메데이아는 비올라를 한 번 힐끗 쳐다봤다.

‘너는 오늘도 또 스스로 헤쳐 나가려 하는구나.’

자신의 죽음마저 염두에 두고서 집사를 시험했다고 한다.

죽음에 가까운 위협마저도, 하얀 벨라투를 위축시키지 못했다는 소리다.

그게 조금 아쉬웠다.

‘나한테 조금 의지해도 되련만.

메데이아는 좋은 언니이고 싶었다.

동생들이 조금은 의지할 수 있는, 아름드리나무 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벨라투라는 생태계에서 그것은 어쩌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진심이었다.

‘나는 네 생각보다 훨씬 단단한 언니가 되어줄 수 있어.’

그 아쉬움과 제논에 대한 분노가한데 어우러져 살기라는 형태로 표출되었다.

“적어도 당신 팔 하나는 가져가야겠는데.”

그러자 비올라가 중간을 막아섰다.

“언니.”

비올라는 사실 두려웠다.

살기를 머금은 메데이아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기가 무서웠다.

지금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그래도 용기를 냈다.

그냥 두면 진짜로 제논의 팔이라도 자를 것 같았다.

“언니의 저를 위한 마음은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요. 벨라투의 형제에게서 이런 고마움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한 걸음 더.

두려움을 이겨내고 메데이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오늘도 느꼈어요. 태풍 같은 기세로 나타나 햇살처럼 저를 보듬는 언니를 보며, 이 언니가 내 언니구나. 내가 이 사람의 보호를 받을 수 있구나. 그런 안도감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벨라투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구나.”

누구보다 벨라투스럽게 행동하는 비올라다.

그 비올라가 벨라투스럽지 않게 말했다.

그런데 저 ‘벨라투스럽지 않음’이 왜 이렇게 마음에 드는 건지 모르겠다.

“언니 앞에서도 벨라투이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전 벨라투 공작이 되고 싶은 마음 따윈 1도 없거든요.

어차피 공작은 언니. 어공언!

벨라투를 이은 언니 앞에서 벨라투인 척을 할 필요가 없지요. 후후후.

“저는 언니가 좋아요.”

그 말에 메데이아는 움찔했다.

비올라의 말을 똑똑히 들었지만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뭐라고?”

그 말을 또 들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비올라는 같은 말을 또 해주지 않고서, 다른 말을 했다.

“그리고 저는 언니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무슨 뜻이니?”

“언니 앞에서 일부러 벨라투로 행동할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벨라투랍니다.”

“네가 벨라투가 아니라고 한 적은 없어.”

다만 나는 네 벨라투스럽지 않음이 좋았을 뿐이야.

내게 좀 더 의지하고, 내게 기대는 동생의 모습이 좋았어.

내 앞에서만큼은 ‘철혈의 공녀’로서의 모습을 내려놓는 것을 바랐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메데이아는 비올라의 말을 차분히 들어주었다.

“만약 언니께서 제 것을 상하게 하신다면 저는 언니에게 책임을 따져 물을 수밖에 없어요.”

“네 것이라 함은… 설마 제논 집사를 뜻하는 거니?”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논은 엄청 유능하단 말이에요.

비록 작품 후반부에나 가서야 비올라를 진짜로 인정하고 돕는 인물이긴 하지만요.

훗날 소중하고 귀중한 전력이자 방패가 되어줄 제논의 팔을 잃게 할 수는 없어요!

그 말은 참고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언니의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제가 처벌하지 않는 제 집사를 언니께서 처벌하시는 건 월권이라고 생각해요.”

이 말을 하면서도 조마조마했다.

혹시라도 메데이아가 기분 나쁘면 어쩌나.

메데이아는 이곳 모두의 생사 여탈 권을 쥐고 있었다.

메데이아가 마음만 먹으면 이곳의 모두를 몰살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월권이라.”

실제로 메데이아는 조금 기분이 나쁜 듯했다.

“내가 내 동생을 다치게 한 사람을 벌하는 것이 월권이니?”

“그 사람이 하필이면 제 것이어서요.”

비올라가 한 템포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제 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 책임이 더 큰 상황인 게 문제랍니다.”

“비록 입양되었지만, 저 역시 어엿한 귀족이잖아요.”

비올라는 이제 고아 한아린이 아니라 귀족 비올라 벨라투였다.

귀족들은 수많은 권리를 가지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따른 의무도 함께 가진다.

“저는 귀족으로서 집사를 부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 권리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에 따라 집사가 사고를 쳤을 때 책임을 져야 할 의무도 함께 가지고 있어요. 그게 귀족이니까요.”

“잘 배웠구나.”

비올라가 쐐기를 박았다.

“만약 언니께서 제논을 벌하신다 .

면, 제논을 관리하지 못한 저도 책임자로서 문책을 받아야 해요. 만약 언니께서 제논의 한 팔을 자르신다면, 저는 적어도 두 팔을 내놓아야겠지요. 언니께서는 정녕 그것을 원하시나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계속했다.

“진정 그것을 원하신다면 저는 언니께 벌을 받겠어요. 제 두 팔을 가져가셔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