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07화 비첸의 집사 펠론은 귀를 의심했다.
‘활을 다룰 줄 아는 누군가가 망루의 사람을 쏘아 죽이고, 문으로 몰래 잠입했다는 얘기가 되겠네.’
‘그러면 오빠. 네가 피 냄새를 맡았던 것도 설명 가능하고, 이미 전투가 벌어진 거야.’
혹시 몰라 제논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네가 설명해 줬어?”
“아뇨. 그럴 리가요.”
사실 집사들은 망루에 사람이 없던 그 순간부터, 대부분의 상황을 읽어냈다.
그런데 집사가 알아내는 것과 일곱살 공녀가 알아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혹시 공작님께서 비밀리에 특수교육을 하셨나?”
“아뇨. 우연히 발견해서 데려오셨어요.”
“그런데 어찌…….”
펠론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리 천재성을 발휘한다고 해도, 어떻게 저 정도의 통찰력을 가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끙.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
“이해하지 못할 때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죠.”
“너는 납득이 되나?”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을 땐 그저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속 편해서 좋겠군.”
펠론이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비첸 공자님을 수행하러 먼저 가보지.”
펠론의 몸이 사라졌다.
먼저 뛰어간 비첸을 은밀하게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제논은 천천히 걷는 비올라의 뒤를 따라 걸었다.
“공녀님은 안 가세요?”
“응.”
“어째서요?”
“여기로 오는 아주 작은 발자국을 발견했어. 무리 지어 움직이지 않았어. 산적의 것은 아닌 것 같아.”
사실 다 알고 있다.
툰드라가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을.
“추적술에 능한 어린아이겠지. 대략 12세 전후인 것 같아.”
“재미있잖아. 왜 스스로 산채를 찾아왔는지.”
“왜라고 생각하세요?”
“뻔한 거 아니겠어?”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아까 죽은 여자의 형제라든지. 원한이 있어서겠지. 사리 분별 안 되는 어린아이니까 앞뒤 안 가리고 달려온 거 같고.”
“……”
“왜? 내 분석이 틀렸어?”
“아뇨. 제가 분석한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비올라가 계속 걸었다.
저만치 멀리서 비명이 들려왔다.
살벌한 비명.
비첸이 산적을 토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올라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 세계에, 익숙해지자.’
비올라가 말을 이었다.
마당을 지나쳐 걸었다. 여기저기, 오두막 형식의 낡은 나무 건물이 있었다.
“사리 분별 안 되는 어린아이. 복수심에 눈이 멀어 이곳을 뒤쫓았다면.”
“아마 제대로 복수하기도 전에 화살을 맞았거나 도끼에 찍혔겠지. 그러니까 안쪽에서는 소란이 없었던 거고.”
제논은 잠자코 비올라의 말을 들었다.
비올라가 그냥 이런 말을 떠들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짐작했다.
‘저더러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거군요.’
비올라 벨라투는 자신의 입장과 역할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모든 것을 통찰하고, 그것을 일부러 말해주고 있었다.
말하자면 자기 어필이었다.
제논 입장에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대단… 하시네요..’
비올라가 말했다.
“그러면 이쪽 어딘가에 그놈이 숨어 있지 않겠어?”
“숨어 있다고 확신하시는 것 같은데요?”
끼익—
문을 열었다.
저만치 구석에 남자아이가 보였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 흙과 땀에 전 가죽옷.
많이 다쳤는지 여기저기 피투성이였다.
비올라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뭐야?’
소설 속에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너 왜.’
그녀가 잘 아는 사람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
보육원에 버려졌던 아린에게 늘 위로가 되는 말이 있었다.
‘괜찮아.’
다섯 살 오빠인 강한준이었다.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그 말은 마법처럼 아린에게 다가왔다.
부모님이 곧 돌아올 거다.
그런 위로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내가 도와주겠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옆에 있어 주겠다고 했고, 실제로 늘 옆에 있어주었다.
학교 옥상에 올라갔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사람도 강한준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어느덧 아린은 열아홉 살이 되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건가?’
애매한 느낌이었다.
남자로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든든한 보호자처럼 느끼는 건지.
‘헷갈리지 말자. 오빠는 그냥 내 보호자 같은 사람이야.’
그냥 오랫동안 함께해 와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서.
같이 만든 추억이 많아서.
그래서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한준이 자신의 여자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예쁜 언니였다.
그날 아린은 질투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다.
그녀는 어느덧 강한준을 좋아하고 있었다.
스스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마음을 숨겼다.
지금 말하면 거절당할 것이 분명했다.
강한준의 따뜻한 눈빛에는 늘 사랑이 있었지만 그 사랑은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나도 이제 성인이야.’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시원하게 고백하고 차이지 뭐.’
그래도 막상 고백하려니 무서웠다.
‘하루만 더 고민해 보자.’
그리고 하루 뒤.
그녀는 검은 옷을 입어야만 했다.
고백을 고민할 대상이 너무 멀리가버렸다.
늘 옆에 있어주었던 강한준은 하늘의 별이 되어 사라졌다.
교통사고였다.
그날은 아린과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그녀는 검은 옷을 입은 채, 장례식 장 구석에서 한참을 울었다.
“나 맛있는 거 사준다며. 월급 탔다며. 왜 안 사줘.”
아무리 애타게 불러봐도 강한준은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나타났다.
열두 살의 어린 모습으로,
*
짐승같이 거친 숨소리를 내는 한 소년이 보였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눈빛은 살아 있었다.
툰드라는 갑자기 나타난 여자아이를 보았다.
아주 작았다.
다섯 살이나 여섯 살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누구…?”
비올라는 툰드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강한준과 똑같았다.
단순히 닮은 수준이 아니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툰드라가 품속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낡고 볼품없는 칼이었다.
칼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비올라가 툰드라의 얼굴을 쳐다봤다.
‘똑같아.’
비올라가 툰드라 바로 앞에 섰다.
“오, 오면 찌른다!”
비올라는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툰드라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종아리.’
종아리를 확인해 봤다.
왼쪽 종아리에 점이 세 개 있었다.
삼각형 모양이었다.
‘뭔데………?’
왜 이것도 똑같은 건데.
비올라는 쪼그리고 앉은 채 툰드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눈동자는 똑같았지만 눈빛은 달랐다.
‘이게…… 우연이야?’
소설 속에 이런 내용은 없었잖아.
‘왜 이런 우연이 있는 건데?”
순간,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어지…… 러워.
툰드라는 머릿속으로 천 번은 더 고민했다.
찔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앞의 이 여자애는 찌르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여기 두목의 딸인가……?’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도 그렇고, 입고 있는 옷도 고급인 것 같았다.
‘정말 두목 딸이라면…….’
이를 꽉 깨물었다.
‘네가 아무리 어린애라도 용서 못해.’
툰드라가 물었다.
“두목 딸이냐?”
“……”
대답해. 두목 딸이냐고.”
비올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툰드라와 눈을 마주친 비올라는 점점 더 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왜 이렇게 어지럽…… 어?’
순간, 툰드라의 눈동자가 거대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눈동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무언가.
보면 안 될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툭!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툰드라가 재빨리 팔을 뻗었다.
비올라의 목에 칼을 겨누고 몸을 일으켰다.
제논을 향해 말했다.
“두, 두목에게 안내해. 그렇지 않으면 얘는 죽는다!”
그런데 그때.
비올라에게서 스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게 칼을 겨눈 거야?”
비올라의 눈빛과 기세가 삽시간에 달라졌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야 진짜 모습을 보여주실 것 같네요, 벨라투 공녀님.’
제논의 눈으로 보기에 비올라의 행동은 이상했다.
저토록 무방비하게 다가가서 꼬마의 다리를 들어 올리다니.
지나치게 무방비한 상태를 계속 보여주었다.
‘일부러 허점을 노출하신 거군요.’
그렇다면 이 상황이 이해가 됐다.
‘비올라 공녀님은 저 어린 소년에게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일부러 자극한 것 같았다.
자극받은 소년이 공녀에게 칼을 겨눴다.
‘모든 것이 공녀님의 뜻대로군요.
공녀의 작전은 완벽히 성공한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어쩌시려나요?”
드디어 진심을 드러낸 비올라 벨라 투.
그녀가 어떻게 움직일지 지켜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