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8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68화 제르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르한준?”
그에게는 발음조차 생소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푸른색 머리카락과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어린 소년이었다.
제르미가 신기하다는 듯 소년을 쳐다보며 물었다.
“소년. 너 인간이야?”
“설마 인간이겠어?”
제르미는 신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으로 보고는 있지만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령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나는 정령이야.”
“오!”
제르미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나 정령 처음 봐.”
“나도 인간 처음 봐.”
소년의 시선이 비올라를 향했다.
어느덧 정신을 차린 비올라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국. 그리고 강한준. 저 정령은 나에 대해 알고 있어.’
정령 문을 통과해서일까?
내가 다른 세계에서 빙의되어 비올라의 몸을 차지한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그러면 나는 마녀사냥을 당할지도 몰라.
‘일단 제논은 이 자리에 없는 것 같고.’
모르긴 몰라도 제논은 일부러 환상에 빠졌을 확률이 높다.
비올라 벨라투의 자격을 검증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쨌든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면 조금 상황이 낫긴 하네.
저 정령이 나에 대해서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야.’
한국이 뭐냐고 물었고 제르미더러 강한준이냐고 물었다.
다 알고 있다면 질문은 하지 않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올라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있어.”
비올라가 단도를 꺼내 들고서 정령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왜 그래?”
“넌 인간과 계약하지 않고 정령 문을 통과한 정령이지?”
비올라는 거침없이 걸어가 소년의 뒤통수를 잡았다.
단도를 소년의 목에 댔다.
소년은 발버둥 쳤지만 비올라의 손아귀 힘을 이기지 못했다.
“놔, 놔라! 나 화낸다!”
“이거 어쩌나. 계약되지 않은 정령은 정령 문을 통과하면서 그 힘을 대부분 잃어버리는데.”
“뭐, 뭐라고?”
“그 사실을 제대로 모르는 걸로 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정령이고, 호기심에 정령 문을 통과한 것 같네.”
소년이 발버둥 친다고 치지만 그 힘이 턱없이 약했다.
“그리고 들어봤을지 모르겠는데, 이 단도는 벨라투의 특수 제작 공방에서 만들어진 마도 병기거든.”
소년의 목에 살짝 가져다 댔다.
비첸이나 제르미 같은 괴물들을 상대하다가 아기(?) 정령을 상대하려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마도 병기는 정령의 몸에 상처도 낼 수 있어.”
정령이 침을 꿀꺽 삼켰다.
누가 봐도 겁을 잔뜩 먹은 모양새였다.
“그러니 남의 기억을 훔쳐보며 장난치려는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비올라는 여태까지 그렇게 해왔듯 눈을 가늘게 뜨고서 살기를 폭발시켰다.
비올라라는 캐릭터 자체가 가지는 살성(殺星)이 빛을 발했다.
딸꾹.
정령이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 정령들은 극도의 공포감을 느낄 때 딸꾹질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 꿈에서 본 왜곡된 것조차 내 기억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 그렇지만 삐-뽀-삐-뽀-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네 바퀴 달린 탈 것과……… 하얀 가운을 입고 달려 대는 인간들과…….”
“그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지.”
단도를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정령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마도 병기의 서슬 퍼런 기운이 느껴졌다.
마, 맞아. 누나는 꿈을 꾼 거야.”
“그렇지?”
“응. 나는 그 꿈을 읽은 모양이야.”
“옳지.”
비올라는 단도를 거두었다.
“내 뒤통수는 언제쯤 놔줄 생각이야?”
“안 놔줄 생각이야.”
“어째서?”
“놔주면 도망칠 거니까?”
“도망 안 쳐.”
“알았어.”
비올라는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뒤통수를 놔주지는 않았다.
그냥 알겠다고만 했다.
“알았다면서 왜 안 놔줘?”
“도망 안 친다고 말했지, 놔달라고는 안 했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럼 놔줘.”
“싫어.”
“왜?”
“뒤통수가 귀여워서.”
정령은 말을 하면 할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비올라가 물었다.
“여긴 어떤 곳이야? 왜 정령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는 거지?”
*
제르미는 턱을 매만지며 걸었다.
저쯤 되면 정령의 뒤통수를 놔줘도 될 것 같은데, 비올라는 한사코 놔주지 않았다.
제르미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거 어쩌나. 계약되지 않은 정령은 정령 문을 통과하면서 그 힘을 대부분 잃어버리는데.’
‘그 사실을 제대로 모르는 걸로 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정령이고, 호기심에 정령 문을 통과한 것 같네.’
제르미는 정령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정령이란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비올라는 정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몇 마디 대화를 통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정령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더 나아가 그 특성을 이용하여 협박 아닌 협박까지 했다.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야 뭐야?’
과연 하얀 벨라투다웠다.
“그래서, 정령아. 우리는 어디 가는 건데?”
“이 유적지는 마법사이면서 정령사였던 가브골의 연구실이야.”
“마법과 정령을 동시에 익힐 수 있어?”
“그랬다. 나도 잘 몰라.”
어두컴컴한 통로를 따라 걸었다.
비올라와 제르미를 위협하는 마물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짠.”
갑자기 불이 밝아졌다.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 아니. 연구실인가?’
각종 포션과 책들. 그리고 커다란 책상이 보였다.
저만치 앞 바닥에는 육망성 모양의 마법진도 보였다.
‘이건 포션 냄새인가?’
오래된 지하실 특유의 습한 냄새와 더불어 각종 포션과 약품들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섞여 있었다.
제르미는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와. 지네가 엄청 크다.”
불빛을 마주한 지네가 황급히 그늘을 찾아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그 크기가 팔뚝만 했다.
비올라는 기겁할 뻔했다.
‘미친!’
지네가 커도 너무 컸다.
저렇게 큰 벌레는 처음 봤다.
솔직히 울고 싶었다.
그런데 제르미가 한술 더 떴다.
“잡아볼까? 저렇게 큰 지네 처음 보는데.”
“그만둬.”
“응? 왜?”
그, 그야.
지네 무서우니까.
다리가 네 개 넘게 달린 것들은 다 무섭다고,
“이곳은 유적지야.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이 좋아. 작은 요소 하나하나가 함정이고 트랩일 수 있어.”
“………그래?”
제르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였다.
왕지네를 못 잡아서 아쉬운 모양이었다.
저대로 그냥 두면 호기심을 참지 못한 제르미가 결국 지네를 잡으러 뛰어다닐 것 같아서, 비올라는 재빨리 말했다.
“여기가 가브골의 연구실이랬지?”
“으, 응. 뒤통수 아픈데 언제 놔줘?”
놔줄 생각이 없었다.
원작에서도 제르미와 이곳에 함께 들어왔던, 제르미의 동료 나디아는 끝까지 정령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원작대로 하기로 했다.
“여기서 무슨 연구를 진행했어?”
“나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몰라.”
“그래, 그렇겠지.”
비올라가 주변을 둘러봤다.
“정령 문이 열리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오잉? 비올라. 정령 문이 열리기에 좋은 조건도 있어?”
“응.”
정령 문은 보통 자연의 기운이 충만한 곳에 열린다.
깊은 숲속이면서, 호수가 있고, 그러면서 햇빛이 따사롭고, 토양이 살아 있는 곳. 거기에 마나를 품고 있는 마나석과 마나 결정들이 풍부하고, 바람이 잘 부는 곳이어야 했다.
그와 동시에 마나의 흐름이 한곳으로 흘러 응집될 수 있는 형태의 특별한 지형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여기는 그 어떤 조건에도 맞지 않아. 그러니까 저건 인위적으로 정령문을 열 수 있는 마법진일 거야.”
“오. 그렇구나.”
“우와. 그랬구, 악, 내 뒤통수! 살살 잡아줘.”
제르미와 정령이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령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통수의 머리카락이 다 뽑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정령아. 너도 몰랐던 거야?”
“나도 몰랐어. 말했잖아. 나는 신생정령이라니까?”
근데 어떻게 비올라는 알아?
“나도 모르지!”
“하긴.”
제르미는 재미있었다.
비올라와 함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어디를 놀러 가는 똑똑한 사람이랑 가야 재미있어.”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저 말은 이곳에서 제르미가 동료인 나디아에게 했던 말과 매우 흡사했다.
「“역시. 어디를 가든 똑똑한 사람이랑 가야 재미있어.”
두 글자 정도 차이가 났다.
비올라에게는 ‘놀러 가든’ 이라고 표현했고, 나디아에게는 그냥 ‘가든’이라고 표현했다.
원작과 아주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래서 나는 저 마법진이 정령 문을 열고, 정령 친화도를 강제적으로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봐. 이곳은 그런 연구를 진행하던 연구실이었고.”
“그러면 저 마법진이 있으면 정령친화도가 낮아도 정령과 계약이 가능한 거야?”
“그렇다고 봐야겠지. 연구가 성공적이었다면.”
“성공적이었다면 세상에 알려져야 하지 않아?”
정령 친화도가 낮은 사람조차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 방법을 크게 반길 것이다.
제르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반대로 생각해야지. 세상에는 마탑이 존재하잖아.”
“무슨 말이야?”
“마탑 입장에서 정령사가 늘어나는 걸 반기겠어?”
마법은 자연의 기운을 인위적으로 가공하여 편리함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정령술은 자연의 기운을 가진 정령의 힘을 빌려 편리함을 추구하는 기술이다.
둘은 서로 상충하는 학문이었다.
“마법사들은 정령사가 많아지는 것을 원치 않아.”
그리고 예전부터 마법사들은 권력 자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음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몰래 연구를 했겠지.”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응.”
이 추리는 모두 나디아가 하는 것이었다.
비올라는 소설 속 내용을 읊었을 뿐이다.
다만, 제르미는 그 사실을 몰랐다.
“너 왜 멋있어?”
“뭐?”
“아냐, 아무것도.”
제르미가 히히 웃었다.
비올라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재미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비올라가 멋있었다.
저 머릿속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지고 있을까?
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얼마나 신기하고 새로운 것투성이일까?
“이곳에 있는 단서들을 조합해서 그런 걸 다 유추해 낼 수 있는 거였구나.”
비올라는 휘잉~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사방이 막혀 있는 방이었다.
바람이 불 만한 공간이 없었다.
‘바람의 정령.’
아마도 정령 문이 약간 열려 있는 모양이었다.
소설과 같았다.
제르미와 나디아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정령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고 표현되어 있었다.
“시간이 없어. 정령 문은 오래 열려있지 않아. 서둘러야 해.”
비올라도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이 적기였다.
정령 문을 열고 정령과의 제대로 된 계약을 진행할 수 있는 기회.
“저게 아마도 정령 문을 열고 정령친화도를 대폭 높여줄 수 있는 마법진이겠지.”
비올라는 성큼성큼 마법진을 향해 걸어갔다.
마법진 앞에 섰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마법진 앞에 서자 정령이 기고만장해졌다.
“흥!”
힘이 강해진 정령은 비올라의 손을 뿌리쳤다.
정령 문에서 새어 나온 정령계의 힘이 정령의 힘을 일부 회복시킨 모양이었다.
비올라는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제르미. 얘 제압해.”
다행히 소설과 똑같이 진행되었다.
제르미가 빠르게 움직였다.
제르미의 검 역시 마도 공방의 명검이었고, 정령을 제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혀, 형. 살려주세요.”
“안 죽여.”
제르미도 신기한 정령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비올라가 제압하라고 했으니 제압만 했다.
히히 웃으면서 말했다.
“지네보다 더 신기한 녀석인데 죽이면 안 되지! 암. 그렇고 말고.”
근데 혹시 해부해 봐도 되나?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진짜로 해부했다가는 비올라에게 혼날 것 같아 얌전히 있기로 했다.
비올라가 말했다.
“오망성.”
다섯 개의 꼭짓점이 존재하는 별모양 마법진.
각 꼭짓점에는 움푹 팬 공간이 존재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네.”
비올라는 재빨리 움직여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것들을 한 움큼씩 쥐었다.
벽면에 붙어 있는 마법 횃불에 손을 대자, 신기하게도 붉은색 구슬모양의 기운이 비올라의 손에 모였다.
그리고 바닥에 고여 있는 지하수에 손을 대자, 이번엔 푸른색 구슬 모양의 기운이 비올라의 손에 모여들었다.
‘뭐 하는 거지?’
비올라가 벽면에 걸린 철제 마법 스태프에 손을 대자 금색 구슬이, 나무 책장에 손을 대자 고동색 구슬이 생성되었다.
마지막으로 바닥의 흙에 손을 대자 흙색 구슬이 생겼다.
‘다섯 개의 속성 구슬?’
비올라가 그 구슬을 오망성 꼭짓점에 하나씩 가져다 댔다.
움푹 패었던 그곳들은 마치 블랙홀처럼 구슬들을 빨아들였고, 그와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