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31화 4공녀 헤라가 물었다.

“어떤 이유로 나를 모욕했지?”

헤라가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 날카로운 살기를 느꼈다.

비첸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비첸이 길들여지지 않은 살쾡이나 표범의 살기도 있었다면,

헤라는 어금니에 독을 숨기고 있는 독사의 살기를 가진 것 같았다.

“내 편지는 잘 받았나 보네, 언니.”

쪽지의 내용은 특별할 게 없었다.

[언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친하게 지내자’는 말은 모욕에 가까웠다.

헤라는 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벨라투가 내에서 친하게 지내자고 한 말은, 너는 내 적수가 되지 않는다.

비올라가 몸을 돌렸다.

그곤 화사하게 웃었다.

“나는 언니를 모욕하지 않았어.”

“이 쪽지의 의도가 모욕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거야?”

“그렇게만 생각했다면 언니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 같은데.”

진짜 모욕으로만 생각했다면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고,

잠재적 적으로 규정했겠지.

그래도 다행이었다. 과정이 어찌 됐든 헤라가 잘 찾아와 주었다.

독자였던 한아린은 잘 알고 있다.

‘언니는 나한테 호감이 있잖아.’

작품으로 봐서 다 안다.

작품 초반부.

환영 만찬회가 끝난 직후, 헤라는 비올라에게 큰 호감을 품는다.

아군이 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가 비올라에게 쫓겨난다.

‘아직도 나한테 큰 호감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언니, 투자할게요. 부디 상한가를 쳐주시길!

사랑합니다, 내 주식님.

헤라와의 만남!

이 파트는 한아린이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게 생각했던 파트기도 했다.

문득, 독자였을 때의 아쉬움들이 떠올랐다.

비올라는 원작 내용을 떠올렸다.

「헤라는 가주가 되기를 포기했다.

대신 헤라는 가주가 될 이를 돕기로 했다.」

신체적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공작이 되고자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채 형제들과 접촉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했다.

누굴 후계자로 키워낼지.

누구와 손을 잡고 동행할지.

끊임없이 형제들을 시험하고 지원한다.

어떤 의미로는 제일 까다로운 형제이기도 했다.

소설 내에서, 공작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헤라에게 선택받은 아이가, 후계자가 될 것이오, 부인.”

“그 아이는 스스로 왕이 될 수 없소.

그러나 왕을 키워낼 수 있는 아이지.”」

다만 비올라는 그러한 헤라를 싫어했다.

그게 초반부 비올라의 실수였다.

한아린은 다시 다짐했다.

절대 그렇게는 안 한다. 헤라와 적이 되는 순간 모든 삶이 피폐해진다.

매 순간 뒤통수를 걱정해야 하고, 모든 삶이 위기의 연속이 되어버린다.

비올라는 그걸 즐기는 변태였지만 한아린은 아니었다.

“진심이었는데 모욕당했다고 느꼈다면 사과할게. 아직 내가 벨라투를 잘 몰라서.”

“모른다고?”

헤라는 황당하다는 듯 한 번 웃었다.

벨라투를 모르는 아이가 환영 만찬회에서 그렇게 했단 말이야?

비올라가 물었다.

“언니는 왜 온 거야?”

“막내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 언니 된 도리니까?”

“그래?”

비올라는 거침없이 헤라를 향해 걸어갔다.

휠체어에 앉은 헤라와 눈을 마주쳤다.

키가 많이 작은 비올라는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헤라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럼 확인해. 내 얼굴.”

얼굴을 좀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코와 코가 거의 맞닿았다.

“맘껏 확인해도 좋아.”

…….”

헤라는 약간 당황했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숨이 느껴질 정도였다.

「환영 만찬회에서, 헤라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동경에서 비롯된 호감이었다.」

내가 만약 저 입장이었다면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거기서부터 시작된 미약한 동경.

나는 저렇게 못 했을 거야.

헤라 자신에게 없는 것이 비올라에게 있었다.

누구에게도 위축되지 않는 광오한 자신감.

포식자의 운명을 타고난 것 같은 오만한 시선.

헤라는 환영 만찬회 때 그런 것들을 느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비올라에게서 묘한 여유가 느껴졌다.

분명히 동생인데, 언니 같은 기분이었다.

‘저건 흉내 내거나 연기한다고 가질 수 없어.’

타고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재능이 틀림없었다.

헤라는 그렇게 오해했다.

비올라가 눈을 마주친 채 말을 이었다.

“나는 아직 벨라투에 대해 잘 몰라.”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하나는 알아. 약육강식. 벨라투의 자격을 증명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곳.”

“잘 이해했네.”

비올라가 헤라의 어깨에 손가락을 얹었다. 헤라 주위를 천천히, 빙글빙글 돌았다. 벨라투를 연기하는 것도 하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러워졌다.

“가족 관계도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이상했어. 어떻게 절름발이 공녀따위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헤라는 열두 살이다.

열 살 이하의 어린아이는 보호받는 법칙에서도 벗어나 있다.

벨라투의 혈육들은 열 살에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며 후계자 후보로서 성장을 시작한다.

열두 살이면 이제 자기 역할을 해야 할 때다.

“공식적인 임무 수행 기록도 딱히 없는데. 이 언니가 어떻게 벨라투로서 2년 동안 성장했지? 나는 그걸 생각해 봤어.”

비올라가 싱긋 웃었다.

우리 언니.

똑똑한 사람 좋아하지?

나, 똑똑해!

“괜찮다면 내 말을 들어보겠어, 언니?”

*

두 다리가 망가진 공녀 헤라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한아린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헤라는 몸을 쓰는 역할이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리를 쓴다.

그녀는 열 살에 ‘하얀 벨라투’로 진로를 선택하여 성장하는 캐릭터다.

“임무가 없는데도 종종 아버지의 서재에 들른다고 하더라.”

“꽤 상세하게 조사했네.”

“응. 집사가 유능하거든.”

……이 아니라 책에서 다 봤거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그 몸으로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그건 내가 모르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얘기가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

이게 비올라가 선택한 맞춤형 접근법이었다.

헤라가 비올라를 쳐다봤다.

마침 비올라는 헤라 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비올라의 옆모습이 보였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내 바로 위에, 제정신이 아닌 오빠가 한 명 있던데.”

“비첸?”

“응. 그 오빠가 왜 언니한테 안 달려들까를 생각해 봤어.”

헤론 공작이 직접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헤라를 건드리지 말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가 직접 명령을 내렸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겠더라. 아버지가 언니를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한 것 같아.”

확실한 얘기다.

소설로 다 봤다.

“네 말이 맞아. 아버지께서 그렇게 명령하셨어.”

“그렇다는 말은 형제들 모두에게 그렇게 하셨겠지?”

헤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합리적인 분이셔.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하셨을 리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특별한 능력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친해지고 싶다? 뭔지도 모르고?”

비올라가 멈췄다.

소설 속 악역처럼 헤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응. 안 돼?”

헤라의 몸이 움찔했다.

목소리에서 귀기(鬼氣)가 느껴졌다.

이건 정말로 타고난 영역이었다.

피에 미친 원귀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비올라는 나름 미인계를 의도했으나, 실상은 귀신계가 되었다.

물론 비올라는 그렇게까지 인식될 줄은 몰랐다.

그저 할 일을 열심히 했다.

지금 중요한 건 헤라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비올라가 소설에서 본 팩트를 짚었다.

“언니는 공작이 되고 싶지 않잖아.”

“…….”

“언니가 원하는 건 킹 메이커(King Maker) 아냐?”

헤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형제들 앞에서 내색한 적은 없는 데….’

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맞지만 그것을 겉으로 내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니 오빠들이야 알 수도 있겠지만, 일곱 살짜리 여자애.

그것도 이 집에 들어온 지 10여 일밖에 안 된 아이가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재미있네.’

새로 들어온 여동생.

비올라와 한번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과연 내가 선택해도 될 아이일까.

아버지의 눈이 얼마나 정확할까.

내가 품고 있는 이 동경은 정당한 것일까.

이 아이에게 품는 환상 같은 건 아닐까.

헤라가 어깨를 으쓱하고서 비올라와 눈을 마주했다.

비올라는 순간 움찔할 뻔했다.

‘이 언니도 눈빛이 살아났네.’

똘망똘망해졌다.

이 모습은,

‘살육 경쟁을 벌이자!’

라며 생기발랄해지던 비첸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한아린은 헤라의 눈빛이 왜 살아났는지 알고 있었다.

‘날 진지하게 시험하고 싶은 거야.’

그러면 그 시험에 잘 통과해 줘야 한다.

헤라가 말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알아.”

“그런데 너는 확정 지어 생각하네?”

“확신하니까.”

“어떻게?”

소설로 봤어.

“언니는 똑똑해.”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아버지의 비호를 직접적으로 받은 사람은 절대 가주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 거야. 그건 편법이니까.”

“그렇겠지.”

“그럼 왜 똑똑한 사람이 아버지의 비호를 자처해서 받았을까?”

“내가 자처했다고? 책임질 수 있는 말이야?”

“나는 아버지를 두 번 만나봤어.”

한 가지 사실을 짚었다.

“그렇게 섬세한 사람은 아니더라.”

그게 내 최애캐의 매력이긴 하지만.

비올라는 그 말을 삼켰다.

“그렇게 섬세하지 않은 사람이, 먼저 나서서 우리 똑똑한 4공녀는 이러이러하니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까?”

비올라는 소설 속 내용을 계속 읊었다.

마치 자신이 다 추리하고 유추한 것처럼.

“아버지는 섬세하지는 않지만 합리적이기는 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똑똑한 언니는 자처해서 비호를 요청했고, 합리적인 아버지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어.”

헤라의 눈이 더 빛나기 시작했다.

“계속 말해봐.”

“언니는 가주가 될 생각이 없고, 대신 가주가 될 이를 옆에서 도울 역할을 자처했을 거야.”

원작 속 비올라는 그것 때문에 헤라를 개무시한다.

“아버지와 언니는 거래를 했을 거야. 언니는 비호를 획득하는 대신 가주 자리를 포기. 그러면서 가주가 될 이를 확실히 서포트해서 벨라투의 번영에 힘쓴다는 거래였겠지.”

“벨라투가에서는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하얀 벨라투’라고 부른다지?”

“맞아. 하얀 벨라투라고 해.”

“그래. 하얀 벨라투로서의 성장. 그건 몸이 불편한 언니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야. 똑똑하고 합리적인 결정이었어.”

비올라는 진심이었다.

독자일 때 분명히 감탄했었다. 이거래는 헤라의 나이 열 살에 이루어지는 거래다.

헤론 공작은 열 살에 자신에게 이런 거래를 제안해 온 4공녀 헤라를 마음에 들어 했고, 헤라의 제안을 수락했다.

비올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진심이야. 나는 언니가 벨라투다웠다고 생각해.”

비첸 같은 살인귀는 될 수 없다.

대신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독자였던 한아린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벨라투다웠다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나는 그 점을 존경해.”

“…….”

“진심이야.”

헤라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벨라투답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존경.’

너무나 의외인 단어가 비올라로부터 나왔다.

아버지의 비호를 받는 겁쟁이.

절름발이라서 경쟁의 대상도 안 되는 등신.

진짜 벨라투를 상징하는 검은 벨라 투가 되지 못하고, 숨어서 머리나 쓰는 하얀 벨라투를 선택한 반쪽짜리 벨라투.

현재 이것이 4공녀 헤라의 현주소다.

그런 자신에게 벨라투답다는 말을 한 사람.

더 나아가 존경한다는 말을 해준 사람은, 형제 중에서는 비올라가 처음이었다.

헤라가 피식 웃었다.

묘한 눈으로 비올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

비올라는 속으로 뜨끔했다. 눈빛이 뭔가 날카로웠다.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 쓰고 연기하는 거. 안 답답해?”

쿵!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