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6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86화
수많은 무인이 사라졌다.
‘옛 무인들의 성지’는 다수의 약한(?) 무인보다 강한 하나의 인격체가 낫다고 판단했다. 그녀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별로 놀라지 않네.”
“당신일 거라 예상했으니까.”
1년여 전,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었다.
메데이아가 이끄는 수색대가 흔적조차 찾지 못한 실종자.
그건 바로 마리앙투의 세나 공녀였다.
“예상했다고?”
“너무 완벽하게 사라져 버려서.”
세나는 부채를 손으로 가리고 웃었다. 오호호호!
웃음을 터뜨렸는데, 손가락 열 개에는 모두 반짝이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비올라가 말했다.
“불쌍한 세나 공녀는 그만 괴롭히고, 진짜 모습을 드러내시지.”
“뭐?”
밝게 웃던 세나는 매서운 눈길로 비올라를 노려보았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헛소리라고 하기엔 반응이 너무 극렬한데.”
“내가 세나가 아니면 누구라는 거지?”
“백룡의 피가 필요한 가짜 영웅.”
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볍게 부채질하며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표정 자체는 다시 여유로워졌으나 눈빛은 날카로웠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우리 비올라 영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어째서 세나가 이곳에 있는지도 안다. 저자는 세나의 ‘육체가 필요했다.
백룡의 피를 가졌으면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극에 달한 자.
그런 조건을 가진 사람이 바로 세나였으니까. 그러고서 저자는 세나에게 깃들었다. “그럼 내 진짜 이름도 알고 있어?”
“물론.”
“내 진짜 이름이 뭔데?”
비올라는 순간적으로 새어 나오는 세나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비올라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비올라는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녀의 정체는 태양왕 칸과 함께 바하카룬을 봉인하였다고 알려진 영웅, 백룡 페일라였다. 백룡 페일라는 오랜 시간 배신을 준비했고 완벽을 꿈꾸었다.」
‘내가 여기서 페일라의 진짜 이름을 말하면.’ ‘페일라’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주변의 마나가 동결되며 페일라의 이름을 언급한 자는 돌로 변할 것이었다.」
“당신의 이름은.”
“그래. 어떤 이름이 나올지 궁금하군.”
말을 하는 순간 돌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비올라는 돌이 되지 않았다.
“칸과 함께했던 가짜 영웅. 백룡페일라.”
「왜냐하면 그녀는 ‘여제의 가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얘기였다. 원작 속에서 절대자가 된 비올라는 마리앙투가를 침공하여 무릎 꿇린다.
그때, 비올라는 그곳에서 ‘여제의 가면’을 강탈하게 된다.
「’여제의 가면’의 속성은 ‘불변(不變)‘이었다.」
그래서 ‘여제의 가면’을 지니고 있으면 아무리 많이 먹어도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변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이 ‘여제의 가면’ 이었으니까.
지금의 비올라는 여제의 가면을 강탈하지 않았다.
다만, 메리사 마리앙투가 직접 빌려주었다. “호호호, 너는 이제 돌이 될 거야.”
비올라는 가만히 서서 세나를 바라보았다. 1초, 2초,
시간이 흘렀다.
자신만만했던 세나의 표정이 돌체 럼 굳기 시작했다.
“어째서지?”
설령, 태양왕 칸이 되살아온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이 안배에서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비올라는 돌로 변하지 않는단 말인가.
“당신이 아무리 백룡이어도, 영원히 살지는 못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존재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의 생명을 ‘불변의 그릇에 담아 유지시켰어.”
‘때’를 기다리면서. 언젠가 ‘옛 무인들의 성지’ 출신의 뛰어난 무인들이 광인이 되고 세상이 절망에 빠져들어 갈 때.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고 악령들의 왕 바하카룬이 부활할 때.
그때까지 존재를 유지시키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다.
“그 불변의 그릇이 이거였겠지.”
마리앙투 가문이 대대로 보물로서 간직해 온 가보. 그것은 바로 ‘여제의 가면’ 이었다.
“…너!”
그제야 세나의 마음이 급해졌다. “얼마나 존재력이 보잘것없으면 남의 몸을 빌려야 겨우 기생할 수 있을까? 어? 움직이지 마.”
비올라는 ‘여제의 가면’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에 단도를 쥐었다. 당장에라도 여제의 가면을 찌르기라도 할 것 같았다.
“불변의 특성이 사라지면 당신도 소멸하겠지?”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건 별로 없어.”
“그 별로 없는 걸 말해. 뭐든지 들어줄 테니.”
비올라가 원하는 건 거창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으면 좋겠어.’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도 부모를 사랑하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받지 않고.’
마탑의 거지들처럼,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불공정한 처우를 받지 않고, 벵가스처럼 ‘복수’라는 이름의 괴물이 탄생하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지 않아도 되고’힉슨, 에르사와 같이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광인이 되지도 않고, ‘죽어야 할 운명의 빈첸이 새 삶을 얻고.”
작가가 설정한 설정값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얻고, 기적의 신관과 마탑의 못난이가 만나 새로운 기적을 꿈꾸고. ‘광인 같은 건 나타나지 않아도 되고.
비올라는 문득 웃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거창하지 않은 게 아니네.”
생각해 보니 거창했다.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일지도 몰랐다. ‘이상이어도 괜찮아.’
이상은 꿈이다. 비올라가 생각하는 꿈은 ‘반드시 이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올라가 생각하는 꿈은 ‘꿈을 이뤄가는 과정’이었다.
꿈을 꾸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 하나 더 있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독립. 들어줄 수 있겠어?”
뭐?” “아무튼. 당신은 못 들어줘.”
비올라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단도가 ‘여제의 가면’을 찔렀다.
순간, ‘여제의 가면’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
세나의 손톱과 이빨이 길어졌다. 그녀가 지면을 박차고 뛰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혼자는 안 죽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을 숨죽여 살아왔다.
태양왕 칸까지 완벽하게 속여가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저 어린 여자애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너는 반드시 죽인다, 비올라!’
원래의 몸인 ‘세나’가 가지고 있던 원한과 백룡 페일라의 원한이 더해졌다. 까앙~!
요란한 소리가 났다.
툰드라의 대검과 세나의 손톱이 부딪친 소리였다.
“방해하지 마.”
시간이 많지 않았다. 백룡 페일라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그것은 마치 마법 영창 같기도 했다.
순간, 툰드라는 몸이 굳어버렸다.
‘몸이?’
일반적인 마법과는 결이 많이 달랐다. 페일라가 사용한 것은 ‘용언’이었다.
그저 언어로 권능을 행사하는 용들의 특별한 힘.
‘내 주변을 이상한 권능이 에워싸고 있다.
툰드라도 처음 당해보는 종류의 속박이어서 당장은 풀어내지 못했다.
‘젠장.’
지치지 않았다면 훨씬 더 빠르게 풀어낼 수 있을 텐데. 지금은 툰드라도 너무 지친 상태였다.
세나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툰드라를 옭아매고 있는 용언이 곧 해제될 거란 사실을 직감했다.
‘괴물 같은 놈!’
그릇인 ‘여제의 가면’에서는 실시간으로 ‘불변의 성질이 흩어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지켜야 했다.
‘먼저 왼팔을 노려야 해.’
비올라의 왼팔을 잘라내기로 했다. 페일라가 팔을 뻗었다.
물의 장막에 막혔으나, 페일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올라를 둘러싼 물속을 마구 헤집었다.
세나가 입술을 말아 올리고 웃었다.
“정령왕의 힘으로는 나를 막을 수 없어.”
백룡은 특별한 힘을 가진 종족이었다. “정령과 용의 언약에 따라, 이 시간부로 24시간 동안, 정령은 힘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다.”
순간, 비올라를 감싸고 있던 물의 장막이 사라졌다. 덥석!
페일라의 팔이 비올라의 팔을 잡았다.
페일라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잘라내야 해.’
정령왕만 없으면 비올라의 팔을 끊어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리라. 그러나 그녀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미안하지만, 나도 검을 익혔거든.”
초검. 동대륙에서 태동한 검술.
마거리트 꽃밭을 머금은 비올라의 몸 주변에 녹색 잎들이 뿜어져 나와 회전하기 시작했다.
“기이한 검술을 익혔구나.”
세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도 접해보지 못한 종류의 검술이었다.
검술이 아니라 마법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페일라, 당신이 잊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페일라는 비올라의 빈틈을 찾으며 노력하면서 되물었다. “잊고 있는 것?”
“태양왕 칸이 정말 당신의 배신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페일라는 삶에 대한 열망이 큰 용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자.
그래서 태양왕 칸을 배신했고, 바하카룬을 추종하게 되었다. “태양왕 칸, 당신의 연인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당신을 살려두었다. 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거야.”
페일라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들이 비올라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태양왕 칸은.”
스스로를 희생하여 바하카룬을 봉인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어.”
칸의 유일한 약점은 연인 페일라뿐이었다. 완전무결했던 그는 어쩌면 바하카룬을 토벌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페일라의 배신을 진작에 알아차렸다. “배신자를 처단할 수 없을 만큼.”
“네가 무얼 그리 잘 아느냐!”
페일라는 거의 절규하듯 소리쳤다. 듣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비올라를 막지는 않았다. 듣고 싶지 않은 마음과 듣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칸은, 언젠가 당신이 이러한 짓을 벌일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칸은 자신의 권능을 친구들과 후손에게 나누어 주었다. 용암 거인 브릭타에게는 ‘용암 거인화’를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강인한 신체를.
그 힘을 이용하여 브란디아 공작은 마탑을 함락시켰다. “벨라투에게는 진안을, 황가에는 태양검을, 마리앙투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어.”
6 “그리고 그분은 유언을 남기셨어.”
– 언젠가 때가 오리라. 후손들에게 때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언했었다. “그는 괴로워했어. 그렇다고 사랑하는 연인을 제 손으로 처단할 수도 없었어. 그래서 선택한 게 자신을 희생하여 바하카룬을 봉인하는 거였어.”
자신의 잘못을 후손들이 바로잡아주기를 바라며, 후손들에게 미래를 맡겼다. “태양왕 칸이 유일하게 비겁했던 지점이었지. 그래도 하나는 확실해.
그만큼 칸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거야.”
비올라가 가볍게 웃었다. “아무래도 때가 찾아온 것 같아.”
어쩌면 소설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는 자신이 이곳에 빙의하게 된 것도 필연일지도 몰랐다. “잘못을 바로잡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