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3


비올라는 순간 멍해졌다.

사실 그녀는 퐁퐁이가 나타날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비올라는 높은 정령 친화력을 바탕으로, 퐁퐁이의 기운을 일부 읽어낼 수 있었다.

여태껏 부름에 응하지 않던 퐁퐁이가 지금은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퐁퐁이…… 너야?”

퐁퐁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뒷모습을 보았을 때는 남자인 줄 알았는데, 옆모습을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남자 같기도 했고 여자 같기도 했다.

정령에게 성별은 큰 의미가 없기는 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퐁퐁이는 분명 아름다웠다.

“응. 나야.”

“너…….”

“모습이 좀 변했지?”

눈물을 퐁퐁 솟아내던 퐁퐁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퐁퐁이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미인이 되어 있었다.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미안해.”

퐁퐁이는 다시금 앞을 바라보았다.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하이디(블러드)의 기세가 흉흉했다.

하이디이자 블러드.

블러드이자 하이디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네놈이지?”

“뭐가?”

“어째서 정령왕께서는 내가 아닌 너를 선택했느냐, 이 말이다.”

하이디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훨씬 더 오랜 시간 그분을 보필했다.”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어. 오늘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꼭 기억하라고.”

하이디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를 둘러싼 붉은 물보라가 끊어 넘쳤다.

당장에라도 비올라를 향해 뿜어낼 것만 같은 기세였으나, 하이디 역시 궁금한 것들이 남은 모양이었다.

“블러드, 네게도 소중한 것이 있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하이디의 눈이 가늘어졌다. “굳이 있다면 네 계약자의 피를 갖고 싶은데.”

전대 물의 정령왕 웨일이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소중한 것을 위하여 제 소멸을 감당할 수 있는 정령만이 진정한 왕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지. 분명 너는 훌륭한 정령왕이 될 수 있을 거야.”

퐁퐁이는 그 가르침을 전해주었다. “소중한 것을 위하여 제 소멸을 감당할 수 있는 정령만이 왕이 될 수 있다고 하셨어.”

그러나 블러드에게 그런 건 없었다.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였다. “내게는 소중한 사람이 있었고.”

퐁퐁이는 비올라를 위하여 목숨을 걸었다. “너한테는 없었어.”

“네가 선택받은 이유가 고작 그따위 것이라고?”

블러드는 납득할 수 없는 듯했다. 정령왕이 되기 위해서 훨씬 더 거 창하고 위대한 다른 것이 필요하다.

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따위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냐.”

퐁퐁이는 소멸을 각오했을 때 깨달았다. 내가 사라지더라도 비올라는 행복하면 좋겠다.

“그게 진짜 위대한 거야.”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군.”

하이디 주변에 붉은 물방울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마법 탄환처럼 비올라를 향해 쏘아졌다.

비올라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퐁퐁이를 믿으니까.”

겉모습이 많이 달라졌어도 퐁퐁이는 퐁퐁이였다. 순간, 퐁퐁이의 몸이 사라지고 비올라의 몸을 따뜻한 물이 덮었다.

‘물의 장막.’

포근한 느낌이었다. 예전의 물의 장막보다 훨씬 아늑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 안에 있으면 온전히 안전하구나. 그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퐁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짐했어. 내가 비올라의 피난처가 되어주기로.”

하이디가 쏘아낸 붉은 물방울은 물의 장막과 만나 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하이디는 화가 난 듯 소리쳤다.

“켈- 베론! 방해하지 마라!”

주변이 후끈 달아올랐다. 쉴 새 없이 증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녀의 몸에서 피비린내가 피어올랐다.

어느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혈우(血雨)였다.

그러나 비올라의 시각 속 혈우는 그리 위협적이지 못했다.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쉼터에서 바깥의 기이한 현상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금 특이한 풍경화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퐁퐁이는 그의 말대로 온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이 안에서는 마치 시간조차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퐁퐁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혈우를 받아내며 비올라에게 말했다.

“늦게 와서 미안한데, 하나만 물어봐도 돼?”

“늦게 온 건 혼낼 건데, 대답은 해줄게.”

퐁퐁이는 잠시 고민했다. 예전처럼 똑같이 말해도 될까.

정령계에서 많은 시간이 지났고,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는데, 예전의 퐁퐁이처럼 굴어도 비올라는 나를 퐁퐁이로 받아줄까.

‘비올라라면, 그렇게 해줄 거야.’

퐁퐁이가 아는 비올라라면, 퐁퐁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준 비올라라면, 그렇게 해주리라 확신했다. “퐁퐁이를 대체할 수 있는 퐁퐁이는 없는 거지?”

상황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비올라는 웃을 뻔했다. 비올라의 기억 속에는 퐁퐁이의 모습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아름다운 미인이 스스로를 일컬어

‘퐁퐁이라 부르는데, 그것이 또 묘하게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나한테 퐁퐁이는 퐁퐁이뿐이야.”

“그럴 줄 알았어.”

전대 정령왕 웨일이 말해준 건 사실이었다. ‘켈-베론. 나의 아이야. 한 가지는 기억하렴. 반지를 대체할 수 있는 반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퐁퐁이를 대체할 퐁퐁이도 없단다.

조금 두렵기는 했다.

나를 대체할 다른 정령이 있으면 어떡하지.

정령계에는 나보다 훌륭한 정령도 많은걸.

나는 불길한 이름을 타고난 켈-베론인걸. 어쩌면 다른 정령은 비올라를 훨씬 더 잘 도와줄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비올라가 말해주었다. 나에게 퐁퐁이는 퐁퐁이뿐이라고.

“정말 오랫동안 생각했어.”

퐁퐁이는 오랜 시간 정령계에 머물렀다. 내게 정말 왕의 자격이 있는지.

내가 정령왕이 되어도 되는 건지.

내가 어른이 되어도 되는 건지.

그렇게 오랜 시간 고심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나는 퐁퐁이로 살아가기로 했어.”

정령왕 켈-베론.

그는 켈-베론보다 퐁퐁이가 좋았다. “나는 퐁퐁이일 때 행복하니까.”

끊임없이 혈우가 내리고 주변은 피바다가 되어갔으나 비올라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없었다. 툰드라는 마나로 검막(劍幕)을 만들어 혈우를 무심히 막아내고 있었다.

넷 중 필사적인 사람은 하이디가 유일했다.

퐁퐁이는 하이디를 향해 말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옆에 있을 때에만 퐁퐁이일 수 있어.”

땅으로부터 깨끗한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땅으로부터 하늘로 쏟아지는 비 같았다.

맑은 물이 붉은 물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하이디의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부수고자 하는 힘은 지키고자 하는 힘을 이길 수 없어.”

“개소리 좀 하지 마!”

하이디의 눈이 충혈되었다. 실핏줄들이 터져나갔고, 꽉 깨문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혈우를 쏟아내며 비올라를 죽이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미워하는 마음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더 위대하니까.”

맑은 물이 붉은 물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세상을 붉게 물들였던 혈우는 사라졌고, 어느새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부는 곳’답지 않게 기분 좋은 훈풍이 불어왔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지킬 거야.”

그게 오랜 시간 끝에 내린 퐁퐁이의 결론이었다. 오늘도 느꼈다.

비올라가 얼마나 절실하게 자신을 부르는지.

‘이제는 부름을 외면하지 않을게.’

비올라가 얼마나 자신을 아끼는지. 퐁퐁이를 대체할 퐁퐁이는 없었다.

오늘 확실히 깨달았다.

‘비올라랑 함께할게.’

퐁퐁이가 하이디를 향해 걸어갔다. 허공에서 붉은 창이 생성되어 퐁퐁이의 몸을 관통했으나, 퐁퐁이는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

“블러드, 정령계로 돌아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의 정령왕. 켈-베론의 명령이니.”

퐁퐁이가 하이디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깨끗한 정수가 하이디의 몸에 흘러 내렸다.

“……0).”

하이디의 몸이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블러드는 사라졌다. 하이디는 블러드와의 계약이 끊어졌음을 직감했다.

“이 미친 정령이!”

하이디는 블러드를 얻고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자신을 외롭게 만든 세상을 부숴버리리라 다짐했었다.

그게 하이디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런데 저 정령왕이 그 꿈을 깨뜨려 버렸다. “용서할 수 없어.”

하이디의 눈이 비올라를 향했다. 이건 비올라 때문이었다.

비올라가 정령왕을 소환했고, 정령왕이 자신의 정령을 정령계로 돌려 보냈다.

‘저것만 죽이면 돼.”

성지’에서 하이디는 ‘옛 무인들의

성장했다.

이곳은 수많은 무인의 생명을 잡아먹고 유지된 곳이다.

하이디도 그 생명력을 많이 먹어치웠다.

‘혈계 마법.’

그녀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제7장.’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리며 마나를 구동시켰다.

혈화관’비올라의 머리에 피로 이루어진 화관이 생성되었다.

연계기.

혈화관 맹폭.

까득.

하이디는 자신의 왼손 검지를 세게 깨물었다.

‘나의 손가락을 제물로 바치니.’

손가락을 끊어냈다.

와그작, 와그작,

자신의 손가락을 씹어먹으며 혈계 마법의 영창을 외웠다.

‘나의 왕, 바하카룬은, 파멸을 명령하소서.’

비올라의 머리 위에 떠오른 혈화관이 폭발하며 비올라의 생명을 집어삼키리라. 하이디는 그렇게 확신했다.

호호호호호호!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비록 손가락을 잃었으나, 너는 목숨을 잃을 거야. 너 같은 건, 진작에 죽였어야 했는데.

그렇게 생각했으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왜?’

혈화관이 반토막 나서 땅으로 떨어졌다. 핏방울이 땅으로 스며들었고, ‘맹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좋은 말이네, 퐁퐁.”

툰드라가 대검을 회수했다. 하이디는 툰드라가 언제 검을 휘둘렀는지도 보지 못했다.

다만, 허공에는 대검이 만들어낸 푸른색 궤적만이 남아 있었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살고 있거든.”

비올라가 말했다. 진정으로 네가 원하는 것을 찾아보라고.

그래서 열심히 찾는 중이고, 아무 래도 찾은 것 같았다. 퐁퐁이의 말이 툰드라의 가슴을 울렸다.

“그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비올라를 위해 움직였다. 하이디는 비올라의 적이었다.

“나의 공녀님을 위해 살아가는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