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61화 이벤타 영감은 꼬장꼬장한 눈으로 비올라 일행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이럴 것을 알고 있었던 비올라는 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차분히 대답했다.

“저는 비올라라고 해요.”

“흥, 근데 그래서 뭐?”

사실 이벤타는 비올라가 ‘엘프들의 숲에 들어왔을 때부터 비올라를 알고 있었다. 이벤타는 은퇴한 신관이면서 바람의 정령술사기도 했다.

정령이 비올라에 대해 알려주었다.

“벨라투의 6공녀예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썩꺼져.”

“영감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는 알고 하는 소리겠지?”

“도와주세요.”

“다른 사람의 말은 전부 다 들어줘도, 너 같은 아이의 말은 안 들어준다.”

이벤타는 비올라를 만나자마자 불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분명히 살성(殺星)이렷다!’

이벤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왔다. 그것이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살아왔었다. 그런 그인 만큼 살성을 가진 자를 경멸했다. 비올라가 말했다.

“본능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

“…….”

“그 아이가 운명을 바꿔보고 싶어서 이벤타 영감님을 찾아왔어요.”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군.”

이벤타는 비올라가 철혈 공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천 개의 가면을 사용하는 다재다.

능한 영애라지.

‘내 눈은 못 속인다.

이벤타는 살성을 지닌 사람을 몇 봤었다.

한때, 품어주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살성을 가진 자들은 하나같이 광인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심지어 치료해 준 이벤타를 잡아먹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

“제논, 비첸을 보여드려.”

제논이 마차 안에서 비첸을 꺼내 보여주었다. 비첸은 얼음 속에 갇힌 상태로 잠을 자고 있었다.

이벤타 영감은 하얀 눈썹을 들어올리고서 곁눈칠로 비첸을 살폈다.

‘저건 뭐지?’

분명 살성의 기운이 묻어나 있었다. 그런데 그 살성의 기운이 묘하게 다른 살성과 달랐다. 살성의 기운인데, 이상하게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벤타 영감은 몸을 돌렸다. “알아요. 영감님이 사람을 치료하지 않겠다고 다짐한걸.”

“잘 아는 것이 왜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귀찮게 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너무 피곤했다.

집에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마음대로 해, 비겁한 늙은이. 끝까지 그렇게 도망만 쳐. 라엘의 악몽이 당신을 끝까지 따라다니고 당신 삶을 좀 먹을 테니.”

가이아는 찔끔 놀랐다. ‘비, 비올라 공녀?’

가이아는 이벤타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까탈스럽기 짝이 없는 노인네였다.

이벤타를 구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이벤타한테 저런 폭언이라니. 라엘의 악몽은 또 뭐고?’

집으로 걸어 들어가던 이벤타가 움찔 멈춰 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이 맹랑하고 작은 계집애가 뭘 안다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오래전, 이벤타는 기적의 신관이라 불렸다. 죽음의 권세를 이겨내는 위대한 신관이었고 이벤타는 그에 대한 깊은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던 중, 겨울성의 군주이자 천살 공작이라 불리던 헤론 공작과 만났다. 헤론은 파격적인 제안을 했었다.

‘‘나의 연인을 살려준다면, 나는 그 대의 종마가 되어 그대를 섬길 것이다. 무슨 방법을 써도 좋다. 부디 살려만 다오.’’ 이벤타는 최선을 다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라엘에게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라엘을 구해내기만 한다면, 그 강력한 헤론 공작을 휘하에 두고 부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라엘을 구해내지 못했다. 결국 라엘은 죽었고 이벤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벤타가 살려내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화였다.

라엘을 구해내지 못한 이벤타는 종종 악몽에 시달렸다.

“당신 말대로 나는 맹랑하고 작은 계집애일지도 몰라. 그렇지만 내 삶에서 그렇게 도망은 안 쳐.”

작가가 설정한 세계에서 등장인물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작가가 그린 미래에서 살지는 않기로 했다. 과거는 작가가 그렸을지 몰라도, 미래는 비올라가 그리기로 했다.

“나는 살성을 가졌어도, 비첸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근데 영감님은?”

“시끄럽다고 했다.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는 몰라도 아주 듣기 싫은 얘기만 쏙쏙 골라 하는 재주가 있구나.”

“이벤타 영감님은 늘 아름다운 세계를 꿈꿨잖아. 지금도 그렇잖아. 그래서 도망치고 있잖아.”

이벤타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의 눈이 비올라를 향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비올라 벨라투!’

저 어린 소녀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굴었다. 이벤타는 속마음을 누구에게도 드러낸 적이 없는데도.

이벤타는 모든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벤타는 겨우 한 명이었고 아픈 사람은 너무 많았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프고 힘들었다.

라엘의 죽음 이후로, 사람의 죽음은 그에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삶으로부터 도망쳤다. “이벤타 영감님은 신이 아니야.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어.”

“나도 안다.”

이벤타도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그의 생각은 그저 헛된 이상향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나는 구해줄 수 있잖아.

맹랑하고 작은 계집애는 살성의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있어.”

작가의 세계가 아닌 비올라의 세계를 위하여. 작가가 직접 설정한 ‘오염된 인간은 되살아날 수 없다’는 설정값을 부수기 위하여.

“영감님만이 나를 구해줄 수어.”

* 이벤타는 사람들을 구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다면, 그냥 내 마음이라도 편해지고 싶었다.

웃기지만 그것이 바로 이벤타 스스로 한 약속이었다.

나비를 치료해 준 것은 일전에 메데이아에게 신세 진 것을 갚았을 뿐이다.

“나는 신관이고, 나의 약속을 스스로 깨뜨릴 수가 없어.”

그래서 조건을 내걸었다. “나의 약속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을 가져와.”

“그게 뭔데?”

“하모나의 왕관, 그 정도면 격이 맞겠지.”

가이아가 움찔했다. 그래도 그건

“영감님, 아무리

좀….”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이벤타는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운명에 맞서보겠다고 하였지.

‘그렇게 거창하게 떠드는 놈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운명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벤타 역시 그랬다.

비올라는 살성을 타고났고 결국 살성의 운명대로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원래는 그래야 했다.

‘그러나 너라면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

그래서 하모나의 왕관을 가져오라 말하였다. 하모나는 엘프들의 숲을 다스리는 엘프들의 왕이다.

그녀의 머리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왕관이 씌어 있었고, 700년 동안 단 한 번도 벗은 적이 없는 보물이었다. 온화하고 인자한 하모나지만 자신의 왕관을 탐하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

자, 너는 어떻게 할 테냐?

“가져다줄게.”

“그래야겠지.”

이벤타가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이봐, 집사. 그 녀석을 내게 넘겨.

죽지 않을 정도로는 관리해 주지.”

이벤타는 비첸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다가 얄밉게 한마디를 보탰다. “아 참, 알려진 것과 달리 그 할망구는 성격이 아주 더럽다. 알고나 있으라고.”

그러고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이아가 물었다.

“공녀님, 어떻게 하실 작정인가요?”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비올라가 제아무리 철혈의 공녀이고 큰 힘을 가졌다고는 해도 이곳은 엘프들의 영역이었다.

“그들은 정령의 대가들이에요.”

기분 좋은 바람이 넘실넘실 불어오 오. 는 것을 보니 바람의 정령들이 왔다.

간 모양이다.

그들은 여기서 보고들은 모든 것을 하모나에게 전해줄 것이다. “그녀는 비올라 공녀님이 왕관을 원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거예요.”

“그래.”

“태연하게 그렇게 대답하실 때가 아니에요. 이제 하모나는 공녀님을 만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이쪽에는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 우리를 왕관을 노리는 침입자로 규정할 수도 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은 엘프들의 숲이고요.”

엘프들은 개인주의적 성격이 강한 족속이다. 보통은 왕의 명령도 잘 안 듣는다.

그렇지만 왕의 왕관을 노린다는 건 다른 문제다. “이곳의 엘프들과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몰라요.”

응? 그런데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 같기도 하고, 제논도 있고 셰일란도 있었다. 게다가 툰드라까지 있잖아?’ 가이아는 툰드라의 발전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경험한 툰드라는 괴물이었다. 어쩌면 메데이아보다도 더 강할지도 모를 괴물. 툰드라가 함께하면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서, 설마 진짜 전쟁을 하려는 건 아니죠?

“화언젠가, 비올라는 제논에게 딸기 에이드의 비법에 대해 물었었다.

“라스본 빙검식도 빙검식이지만, 사실 정령수의 역할을 아주 크답니다.”

“정령수?”

“네, 퐁퐁이의 눈물이요. 정확히는 정령빙이겠지요?”

제논은 일전 퐁퐁이의 눈물바다를 모아놓았고, 그것으로 얼음을 제조하여 딸기 에이드를 만들었다. “정령빙으로 만들면 더 맛있어?”

“일반적인 얼음보다 어는 온도가 훨씬 낮아서 시원할 뿐만 아니라 기이한 기운까지 녹아들어 있어요.”

기이한 기운은 다름 아닌 기적의 물 ‘아레나’였다. 퐁퐁이는 아레나가 흐르는 강물에서 헤엄치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아레나의 기운이 퐁퐁이에게 깃들어 있었다.

“아레나의 또 다른 이름들은 알고 계시지요?”

“기적의 물. 혹은 생명수.”

비올라는 제논표 딸기 에이드가 왜 그렇게 맛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레나.

그러니까 생명수 덕분이었다. “아레나의 기운과 딸기가 반응해서 훨씬 달콤하고 싱싱한 맛이 난답니다.”

아레나에는 생명의 기운이 녹아 있었다. 그리고 비올라는 아레나를 잔뜩 머금은 마거리트 꽃밭을 반지에 품고 있었다. 비올라의 몸 주위로 화풍(花風)이 불기 시작했다.

셰일란은 그 화풍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내가 가르쳐 준 적이 없는 초검이야.”

비올라는 스스로 초검을 만들어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검술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셰일란은 스승의 말씀을 떠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검이 무엇인지 아느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검은 초검이죠!’

‘아니란다. 잘 생각해 보거라.’

‘초검의 최종 검식 ‘녹음 세계’가 제일 무서운 검이에요!’ ‘틀렸다. 가장 무서운 검은 사람을 살리는 검이다.

‘에이, 스승님 허풍은! 검이 어떻게 사람을 살려요?’

‘그를 일컬어 생검(生劍)이라 부른단다.

셰일란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조금 깨달았다. ‘사람을 살리는 검.’

기적의 생명수를 머금은 꽃밭이 펼쳐졌다. 비올라는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초검을 운용했다.

그녀의 무의식이 초검의 마나 흐름을 거꾸로 이끌어냈다. ‘나는 살성을 타고났어.’

누군가를 죽이는 힘을 타고났다. 그건 작가가 설정한 힘이었다.

‘그걸 거꾸로 사용할 수 있을 거야.’

보라색 꽃 폭풍이 주변을 휘감았다. 꽃잎들이 휘날리며 비첸의 몸을 감쌌다.

비올라의 머릿속에, 과거 글자로 접했던 벨라투의 그림자> 속 세계가 펼쳐졌다.

「생검의 구결을 가르쳐 주마.

셰일란은 스승의 말이 허풍이라 생각하면서도 구결에는 귀를 기울였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권세를 부렸으나.」

그 구결이 비올라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권세를 부렸으나.”

독자 아린은 구결을 보며 유치하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진부한 대사는 어떻게 생각해 낸 거람. 이러니까 셰일란이 개그캐가 되어버렸지.

그렇게 비웃었었다. 비웃음은 이제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초목의 노래가 사망권세를 이겨.”

툰드라는 검을 거두었다. 메데이아도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비올라가 무엇인가를 하려는 것 같았다.

비올라의 초검에서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비첸의 몸에 아레나가 깃들기 시작했다.

보라색 꽃잎으로 가득 찬 세계는 경건했다.

메데이아는 검을 내려놓고 비올라를 향해 걸어갔다.

‘진심이구나.’

비올라는 눈을 감고 있었다. 메데이아가 비올라의 오른손을 잡았다.

‘혼자서 감당하느라, 많이 힘들지?’

비올라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마 많이 어지러울 것이다.

저 작은 몸으로 이 무게를 지탱해내고 있었다.

‘언니가 함께할게.’

메데이아도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몸을 관조하며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몸은 하나의 우주였고, 그 우주로부터 충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비올라에게 전해졌다. 툰드라도 문득 정신을 차렸다.

‘옆에 있을게요.

툰드라도 비올라 옆에 섰다.

비올라의 왼손을 잡았다.

비올라의 손은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비올라가 무엇에 간절한가.

툰드라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툰드라는 비올라가 비올라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올라의 삶에 동행할게요.”

그 삶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적어도 지금 비올라의 삶은, 비첸을 살리는 삶이었다.

“삶이 깃든 노래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리라.”

유치하기 짝이 없던 대사가 권능이 되었다. 생명의 기운이 비첸을 가득 덮었다.

비올라는 어마어마한 탈력감에 빠져들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툰드라가 비올라를 부축해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제논.”

“알겠습니다.”

제논이 재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빙(水)의 기운을 끌어냈다. 라스본 빙검식을 사용하여 비첸을 급속 냉결 시켰다.

나비를 얼릴 때와 같은 방식이었다.

비올라는 오늘 확실히 깨달았다.

‘이 세계는 작가의 세계가 아니야.’

원래 소설 속 비첸은 죽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비올라의 칼에 찔려 죽는다.

소설 속 비올라는 결국 겨울성의 주인이 되지만 외로웠다.

그녀 주변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게 작가가 그린 세상이었다.

‘하지만 아니야.’

오른손에서 메데이아의 온기가 느껴졌다. 왼손에서 툰드라의 다정함이 전해졌다.

툰드라는 옆에 굳건히 서서 비올라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소설 속 비올라는 혼자였지만 지금의 비올라는 혼자가 아니었다.

‘작가가 원하는 결말과 내가 원하는 결말은 달라.

독자였을 때 아린은 결말에 대하여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벨라투의 그림자>는 작가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독자 아린은 작가를 응원하고 존중했었다.

‘이젠 달라졌어.

사람 비올라는 그 세계를 존중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너도, 우리는,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니니까.

이곳은 글자의 세계가 아니었다.

이곳은 이제 비올라가 살아가는, 비올라의 세계였다.

‘내가 그리는 세계의 결말에 네 죽음은 없어.”

반드시 비첸을 살리기로 작정했다. “가이아, 이벤타 영감님의 거처를 알고 있지?”

* 메데이아는 겨울성으로 향하기로 했다.

겨울성에서 벌어진 사건을 조사하기 위함이다.

떠나기 직전 메데이아가 말했다.

“부디 원하는 바를 이루렴.”

메데이아가 비올라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내 동생을 구해줘, 비올라.”

비올라가 메데이아의 동생이듯, 비첸 역시 메데이아의 동생이었다. 메데이아는 겨울성으로 떠났다.

마차 안.

가이아가 말했다.

“이벤타 영감은 ‘엘프들의 숲’에 기거하고 있어요.”

“길은 알고 있지?”

“알고 있지만…… 이미 나비를 치료하러 보내서요.”

이벤타 영감은 괴짜로 불렸다. 환자를 치료해 주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더 이상 누구도 치료해 주지 않는 퇴역 신관.

그럼에도 나비를 보낼 수 있었던건 메데이아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시간은 맞출 수 있겠지만… 나비나 비첸 공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도 몰라요.”

나비와 비첸. 둘 다 위독한 상태였다.

“그런데 나비 의뢰가 먼저였잖아요. 그 영감탱이는 일의 순서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그러면 이벤타는 비첸이 아니라 나비만 치료해 줄 가능성이 높았다. “괜찮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네.” 가이아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한 말로 기대도 조금 되었다.

이벤타 영감은 고약한 성질머리로 유명했다.

‘벨라투의 철혈 공녀가 이벤타 영감을 구슬릴 수 있을까?”

이벤타 영감이 기거하는 ‘엘프들의 숲’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녹음이 유독 우거진 숲이 보였다.

나무는 거대했고, 나무 넝쿨이 주변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엘프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어요.”

가이아는 아공간에서 초록 나뭇잎을 하나 꺼냈다. 그러자 나무 넝쿨이 저절로 양옆으로 움직이며 길을 열어주었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엘프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종족이에요.”

엘프들은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종족이었다. 편의상 ‘왕’이 존재하지만 엘프들은 왕의 명령을 그다지 잘 따르지 않았다.

개중에는 인간을 적대시하는 엘프들도 있었고, 다짜고짜 화살을 날리기도 했다.

“……근데 화살 같은 건 전혀 안 보이네요.”

가이아는 어찌 된 영문인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비올라 공녀에게 가득한 정령의 기운 덕택이야.”

사람이 저토록 정령에 가까운 힘을 품을 수 있다니. 보통 저렇게 정령 친화도가 높으면 정령화되게 마련이었다.

드물기는 하지만 정령화가 진행되어 인간 세계를 미련 없이 떠난 정령사도 여럿 존재했다.

‘하지만 달라.’

무엇이 비올라 공녀를 이토록 간절하게 만드는 걸까. 가이아의 조사에 따르면 비올라와 비첸은 이토록 긴밀하고 애틋한 관계는 아니었다.

비올라는 철저히 철혈 공녀였다.

‘내 조사가 잘못된 걸까, 비올라 공녀가 변한 걸까?’

어느 쪽이든 큰 상관은 없다고 생각했다. 가이아는 개인적으로 철혈 공녀 비올라보다는 지금의 비올라가 훨씬 좋았다.

이쪽이 훨씬 더 ‘진정한 지배자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니까.

‘제 사람을 소모품으로 다루기 시작하는 순간, 지배자의 몰락은 시작되는 거니까.’

적어도 비올라에게서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배자로서 필요한 모든 덕목과 능력을 타고났으면서도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은 공녀였다.

가이아가 판단하기에는 그랬다.

“이랴!”

넝쿨이 양옆으로 계속 비켜나며 길을 생성해 주었다. 마치 길을 안내해 주는 것 같았다.

셰일란이 말들을 멈추었다.

“워워.”

굉장히 커다란 버섯이 보였다. 지나치게 거대하기는 했지만 버섯이 틀림없었다.

버섯에는 문과 창문과 굴뚝이 있었다.

문이 열렸다.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 나왔다.

「이벤타 영감은 ‘거대 버섯 집에서 살았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했다. 그는 늘 종려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비올라는 저 노인이 이벤타 영감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벤타 영감의 품에는 나비가 안겨 있었다.

이벤타 영감의 품이 편한지, 나비는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요.”

“남의 집에 마차를 끌고 무턱대고 쳐들어와서 하는 말이 부탁이 있다?”

이벤타 영감은 코를 후볐다. “예의가 없어도 유분수지. 험한 꼴당하기 전에 썩 돌아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