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9


그러니까 가장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 변수가 작가가 만든 세계에 기적을 일으키기로 했다.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59화

“내 이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헤헤.”

분명 비첸의 목소리였다. 비첸은 평소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러나 비올라는 저 목소리가 비첸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첸인데, 비첸이 아니야.’

소설 속 내용이 떠올랐다. 「악령들이 왕으로 모시는 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하카룬이었다. 바하카룬은 절망을 잡아먹는 어둠이었으며, ‘열풍’과 ‘데스’가 추종하는 왕이기도 했다.」 모든 악령이 왕으로 모시는 존재였으며 강대한 힘으로 인간 세계를 절망에 빠뜨렸다는 전설이 전해졌다. 「바하카룬의 영향력에 닿은 자의 눈은 새까맣게 물들었고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시꺼멓게 물든 눈. 그 눈에서 흐르는 피.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오염’이라 표현하였다.」

‘비첸이 오염됐어.’

「오염된 인간들은 자아를 잃어갔고 종국에는 피에 미친 광인이 되었다.」

“비올라, 네 피는 향긋할까?”

비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하카룬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시작한 거야.”

바하카룬은 차원 너머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봉인되어 있다. 여전히 그 봉인은 유효할 것이었다.

이 세계가 결말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도 바하카룬의 봉인은 풀리지 않았었다. 아무리 ‘열풍’과 ‘데스’의 추종자들이 활개를 치고 바하카룬의 부활을 위하여 노력했어도 바하카룬의 금제는 깨지지 않았었다.

「태양왕 칸, 겨울 검제 하, 용암거인 브릭타, 백룡 페일라가 목숨을 바쳐 만들어낸 봉인은 그 누구도 깨지 못했다.」

태양왕 칸은 모나크 제국의 초대 황제였다. 겨울 검제 하제은 벨라투의 초대 가주였으며, 용암 거인 브릭타는 브란디아가의 초대 가주였다.

「바하카룬은 강대한 힘을 봉인당해 차원 균열 어딘가에 갇혔다.

네 명의 영웅도 온전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자는 오직 백룡 페일라뿐이었다.」

백룡 페일라는 친구들을 잃은 것을 슬퍼하며 인간 세계에 남았다. 훗날 인간과 결혼하여 자손을 번성시켰는데 그 가문이 바로 마리앙투공작가였다. 모나크 제국의 황제와 3대 공작가를 만들어낸 자들이 합심하여 바하카룬을 봉인해 냈다는 소리였다.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열풍’과 ‘데스’는 바하카룬의 힘을 일부 끌어오는 것에 성공하여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다.

‘소설 속 비올라는 열풍과 데스를 토벌하고, 결국 벨라투를 지배하게 돼.’

그것이 소설 속 비올라가 풀어갔던 숙제였다. 그 숙제가 지금의 비올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메데이아가 대검을 꺼내 들고 앞으로 나섰다.

“비첸, 꼴이 말이 아니구나.”

메데이아는 비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비첸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마음이 아프구나.’

나는 오늘 어쩌면 내 동생을 베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메데이아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나는 검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로, 내 가족을 절대 베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메데이아 누님은 방해하지 않으면 좋겠는데요, 헤헤.”

“그러나 오늘 그 약조를 깰 수도 있겠구나. 살기를 거두거라.”

“누님.”

헤실거리며 웃던 비첸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순간,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말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고, 셰일란은 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비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지?’

그리고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안 보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뿜어내는 검광이 번쩍였고, 그 이후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물의 장막.’

비올라는 퐁퐁이를 소환하여 물의 장막을 펼쳤다. 혹시 몰라 가이아도 함께 보호했다. 퐁퐁이는 크게 외치며 비올라와 가이아의 몸을 덮었다.

“퐁하는 위대하시다!”

악녀 하이디를 끝까지 지켜주었던 물의 장막이다. 비올라는 퐁퐁이의 힘을 믿기로 하고서 가이아에게 말했다.

“바하카룬이야.”

“바하카룬이요?”

가이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깨달았다. “설마,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그 바하카룬이요?”

그녀도 깨달았다. “설화 속 이야기와 같기는 한데.

그래도 그건 허구잖…….” 허구라고 보기에는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겨우 열네 살에 불과한 비첸이 메데이아와 거의 동격이었다.

둘의 전투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숨 막히게 빨랐으나, 이따금 보이는 메데이아의 몸에는 가벼운 상처가 생겨나 있었다.

‘오히려 메데이아 공녀가 밀리는 듯한데.’

체력적으로 메데이아가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직접 전투를 치르지는 못하지만 전투를 읽어내는 눈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메데이아 공녀가 밀리고 있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비첸이 어떻게 메데이아보다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단 말인가.

“허구가 아니군요.”

“그래.”

“어떻게 보자마자 아셨어요?”

“책을 많이 읽었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가이아는 공부를 더 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올라가 말했다.

“열풍과 데스의 목표를 알 것 같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모든 정보를 함부로 풀 수 없어서 함구하고 있었다. 밤 고양이의 수장 가이아 역시 모든 것을 유추해 냈다.

“바하카룬의 완전한 부활을 원하는 건가요?”

“그렇겠지.”

태양왕 칸. 겨울 검제 하제.

용암 거인 브릭타.

백룡 페일라.

전설 속 네 영웅이 합심하여 막아냈던 악령의 지배자.

비올라가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그걸 막아내야 하는 입장인 것 같네.”

소설 속 비올라도 그렇게 했다. 물론 목적은 달랐다. 소설 속 비올라는 겨울성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그렇게 했다.

지금의 비올라는 겨울성의 지배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여태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계의 영웅이 되고 싶으신 건가요?”

“거창한 목표 같은 건 없어.”

그저 소소한 독립이 목표였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비올라의 신조였다.

“근데 비첸을 저렇게 만들었잖아.”

처음에는 아니었다. 그저 피에 미친 살인귀 꿈나무였다.

비올라는 살아남기 위해 비첸을 다 독이고 구슬렸다.

“비첸은 늘 내게 진심이었어.”

표현의 방식이 조금 이상했을 뿐, 비첸은 늘 비올라의 편이었다. 세상에 두려울 것 없는 천방지축소년이 비올라에게 미움받는 것은 두려워했다.

비틀린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올바른 애정을 가진 소년이 되었다.

“내게는 가족이 필요했는데.”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

나의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고, 또 내가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늘 갈망했었다. 비첸은 그중 한 명이었다.

열풍과 데스는 비올라의 가족을 오염시켰다.

툰드라.”

그는 마치 비올라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비올라 옆에 곧장 섰다. 비올라가 입을 열었다.

“비올라의 삶을 살라고 했었지.”

“네.”

한아린의 삶. 비올라의 삶.

무엇이 진짜 나의 삶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비올라의 삶을 살기로 했다. 비올라는 가족을 지키기로 했다.

“비첸을 죽여줘.”

작가가 직접 설정했었다. 「바하카룬의 사이한 기운에 오염된 자는 결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었다.

오염된 자는 붕괴되는 자아 속에서 끔찍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비올라의 귀에 환청이 들렸다. -너무 아파. -비올라. 비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연고도 소용없잖아.

연고로 낫게 해줄 수는 없었다.

지금 비올라가 해줄 수 있는 건,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는 것뿐이었다.

“스승님도 툰드라를 도와줘.”

셰일란은 그다지 겁내지 않고 되물었다. “괜찮겠어요?”

“부탁이야.”

“제자님의 부탁이라면.”

녹음(綠陰)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논이 말했다. “공녀님, 울지 마세요.”

비올라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논은 비올라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하얀 냉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땅과 바람이 얼어붙었다.

제논은 비올라가 슬픈 것이 싫었다.

비올라를 슬프게 하는 모든 것을 베어내기로 마음먹었다.

비올라도 정신을 집중했다.

비올라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이제는 보여.

메데이아와 비첸이 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메데이아의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툰드라가 합류해서 패도적인 검을 내질렀다.

메데이아의 목을 찌르려던 비첸은 황급히 단도를 회수했다.

“제자님의 부탁을 수행하러 왔습니다.”

셰일란의 초검이 비첸의 옆구리를 노렸다. 비첸의 옆구리에 상처가 났다.

동시에 제논의 얇은 장검을 내질렀다.

시퍼런 냉기가 가득한 그 검이 향하는 최종 목적지는 비첸의 심장이었다.

비첸은 공중제비를 돌아 그 검을 피해냈다.

기적의 물 ‘아레나’를 머금은 마거리트 꽃잎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진심으로 초검의 힘을 이끌어내며 구결을 읊었다.

“자색혈화(紫色血花)가 피어올라 소중한 모든 것을 덮으리라.”

비올라의 초검이 비첸의 온몸을 난 도질했다. 비첸의 몸에도 잔상처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비첸은 괴로운 듯 비명을 질렀다.

‘마음이 너무 아파.

그러나 그건 잠시였다. “방심하면 못 쓰지.”

비첸이 단도를 휘둘렀다. 비올라의 앞머리 몇 가닥이 잘려나 갔다.

비첸의 몸에는 검 세 자루가 꽂혀 있었다.

메데이아와 툰드라의 대검.

제논의 장검.

비첸은 세 사람의 검을 몸으로 받아내며 비올라만을 노렸던 것이다.

“헤헤, 아쉽다.”

셰일란의 팔 한쪽이 잘렸다. 셰일란 덕분에 비올라는 살 수 있었다.

제논이 재빨리 팔을 주워 들어 냉결시킨 뒤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이후, 재접합을 위한 재빠른 처사였다.

“나는 비올라를 죽여야 하는데. 죽이고 싶다, 헤헤.”

비첸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비첸은 소설 속과 똑같은 대사들을 내뱉었다.

어린 시절부터 비첸은 늘 비올라를 죽이고 싶어 하며 살육 경쟁을 펼치길 원했다.

작가가 설정해 놓은 설정값이었다.

비첸은 지금도 비올라를 죽이고 싶다며 소설 속 대사와 같은 말들을 읊었다.

마치 그것이 비첸의 정해진 운명인 것처럼.

비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싫어.’

이런 건 싫었다. 작가가 설정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 싫었다.

원작 속에서도 비올라가 비첸을 죽인다.

이 상황은 비올라도, 비첸도 원하지 않았다. ‘이거 아니야.’

비올라에게는 비올라가 살아가는 방식이 있듯, 비첸에게는 비첸이 살아가는 방식이 있을 터였다. 적어도 이것이 비첸이 살아가는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빠는 오빠의 삶을 살아야지.”

등장인물 비첸 말고. 사람 비첸의 삶 말이다.

내가 구해줄게.’

사람 비올라는 작가가 설정하지 않았다. 비올라에게는 ‘버림받은 고아 한아린’이라는 설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벨라투의 그림자>에 현대인의 빙의라는 설정은 없었다.

지금의 비올라는 작가가 그린 세계 속에는 없는 비올라였다.

말하자면 비올라는 이 세계에서 가장 큰 변수였다.

‘내가 가장 큰 변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