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0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50화 서신의 봉투 따위가 왜 저렇게 고급진가 했더니, 황제의 서신이라서 그렇단다.
비올라는 두 손으로 황제의 서신을 받아 들었다.
[친애하는 비올라 영애에게.]
비올라는 편지를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가슴이 꽉 막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이건 황제의 서신이 아니었다.
황제의 직인이 찍혀 있을 뿐, 사실은 셀리나의 서신이었다.
[……하여 그대를 영입할 것을 제안한다.]
다시 말해 이 편지는 제국의 스카우트 제의였다. 비올라의 뒤에선 퀘이사가 흐응, , 하고 웃었다.
“뭐야? 셀리나 대신이 뿌리는 스카우트 제안서잖아?”
“이모도 알고 계세요?”
“물론이지. 매년 초가 되면 그녀가 발굴해 낸 인재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것은 각 가문의 자제들에게 영광이자 훈장이 되기도 하였다. 누가 먼저 그 서신을 받느냐.
그것이 자제들의 자존심이 되기도 했다. “근데 지금은 연말인데.”
황제의 직인이 찍힌 셀리나의 서신. 이 서신은 원래 연초에 전해진다. “셀리나 대신이 어지간히 달아올랐나 봐.”
여태껏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연초가 아닌 연말에 스카우트 제안서를 보내다니.
“역시 우리 며늘아기는 여기저기서 사랑받는구나, 흐응.”
* 비올라는 헤론의 서재를 찾았다.
‘아.”
영 타이밍이 안 좋은데. 헤론의 서재에는 헤론 대신 이사벨라가 있었다.
비올라 자신을 죽이라는 의뢰를 했던 이사벨라가.
헤론이 자리에 없을 때 권한을 대행하는 사람이 이사벨라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지극히 불편했다.
이사벨라는 검토하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비올라를 쳐다보았다.
“6공녀, 복귀하였군요.”
“네, 어머니께서 몹시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이사벨라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고, 비올라는 크게 겁먹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겁먹지 말자.’
이사벨라에게 약점을 보이는 순간 잡아먹힌다. 절대로 약해지면 안 된다.
“그림자 속에 숨은 건 내 동생일테고.”
비올라의 그림자 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대며 일어섰다. 비올라는 발작할 뻔했으나 최대한 마음을 다스렸다.
‘왜 거기 있냐!’
큰 키에 늘씬한 체형을 가진 여인. 퀼튼가의 가주 퀘이사 퀼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언니 눈썰미는 여전하네.”
“네가 왜 여기 있어?”
“흐응, 글쎄, 내가 왜 여기 있을까?”
이곳의 세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이사벨라가 퀘이사에게 살해 의뢰를 하였고, 퀘이사는 그 의뢰에 실패했다.
당연히 암살 대상은 비올라였다.
다 알고 있지만 암묵적으로 그 사실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퀘이사, 나는 지금 공작님의 서재에 있어.”
공작이 없을 때는 이사벨라가 공작의 권한을 대행한다. 그러니 지금은 언니가 아닌 공작의 권한대행으로 대하라는 소리였다. “에이, 언니도 참 빡빡하게 구네.
우린 자매잖아. 난 그런 예의와 법칙 따지는 거 싫더라.”
“싫어도 지킬 건 지켜. 공식적인 업무 일정이 없다면 비켜줘.”
“언니 혹시 화났어?”
“내가 화날 일이 뭐가 있지?”
“내가 의뢰를 실패해서?”
“실패가 아니라 포기겠지.”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왜냐하면 이 아이가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버렸거든.”
“마음에 들었다?”
“응. 며느리 삼고 싶어졌지 뭐야.”
아니, 저기요 여러분. 지금 저를 앞에 두고 그런 말씀 나누시는 건가요.
비올라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사벨라의 시선이 비올라를 향했다.
“비올라, 네 생각은 어떤가요?”
이사벨라는 딱히 살해 청부를 숨길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여러 명분을 미리 준비하고 있겠지.
그래서 비올라는 살해 청부와 관련한 책임을 딱히 따져 묻지는 않고 대답했다. “저는 그저 묵묵히 제 갈 길을 갈 뿐이지요.”
“그렇군요.”
이사벨라는 쓰고 있던 안경을 내렸다. 분위기가 묘하게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응? “퀼튼가와 혼인을 맺는 건 벨라투에게도, 퀼튼에게도 좋을 테니. 더더군다나 지지기반이 약한 비올라라면 더더욱.”
아뇨. 저기요.
그게 무슨 개족보입니까!!
아무리 세계관이 그렇다고 해도,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이사벨라가 말했다.
“6공녀를 대신해서 내가 공작님께 건의해 보도록 하죠.”
이사벨라는 퀘이사의 생각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판단하기에도 비올라는 뛰어난 아이였다.
‘저 아이가 키라엘과 혼인하게 된다면, 내 아군이 될 수도 있는 거겠어.’
그녀는 여전히 비올라가 미웠다. 비첸을 타락시킨 악마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비올라라는 전력을 흡수하는 건 다른 얘기였다. 감정을 떼어놓고 생각해야 했다.
“제 혼인은 제가 결정합니다, 어머니.”
“키라엘은 배필로서 더없이 훌륭한 사내아이랍니다, 딸. 공작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럴 수도 있었다. 비올라는 벨라투의 입양 딸이고 키라엘은 퀼튼의 적통 후계자다.
조건만 놓고 보면 키라엘이 훨씬 앞선다.
실제로 비올라에게도 든든한 지원군이 생기는 것이기도 했고, 그러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헤론은 이 결혼에 찬성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키라엘은 사이코패스라고. 사이코패스와 엮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비올라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키라엘이 훌륭한 사내아이라고요?”
안 되겠다. 일단 파토를 내야겠다.
비올라가 피식 웃었다.
한없이 교만해 보이도록.
“제 옆에서도 과연 훌륭한 사내아이일까요?”
이사벨라와 퀘이사를 번갈아가면서 바라보았다. “제가 이루어 놓은 것과 키라엘 공자가 이루어 놓은 것. 정확한 비교를 해주시길 바라요.”
키라에 따위는 나와 비교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지극히 오만한 말이었으나 이사벨라와 퀘이사는 둘 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야 어찌 되었든 맞는 말이었으니까.
실제로 비올라는 수많은 것을 이루어냈고 키라엘은 대외적으로 이룬 업적이 아무것도 없었다.
“6공녀, 지나친 자신감은 오만 그런데 그때, 문이 열렸다.
“틀리지 않은 말이구나.”
헤론이었다. 전투를 치른 직후인지 온몸이 흙투성이였고, 이마에 가벼운 상처가 있었다.
평소의 깔끔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흐응, 헤론, 아니, 형부, 오랜만이 네.”
“제안을 거절하지. 비올라는 환영만찬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키라엘과는 격이 맞지 않아.”
이사벨라는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공작님의 호흡이 거칠어..
대마물과 전투라도 치르고 온 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호흡이 아직까지 거칠 이유는 없는데.
혹시 큰 부상을 입으신 건가?’ 아마도 그런 것이라 짐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부상.
그 때문에 호흡이 거친 것이리라. “그리고 비올라는 아직 너무 어려.
혼담은 추후 다시 말하도록 하지.”
“형부, 그래도 오랜만에 친구 만났는데 인사 정도는 좀 해줘. 우리 옛날에 친했잖아.”
“우리가 친했던 때가 있던가?”
헤론의 눈동자에는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 “쳇. 안 통하네.”
“좀 쉬고 싶은데.”
“나가달란 뜻이지?”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거기서 비올라는 이상함을 느꼈다.
쉬고 싶었다면 여기가 아니라 방으로 갔을 텐데…….’
어차피 겨울성의 대소사는 유능한 이사벨라가 잘 처리하고 있을 터. 쉬고 싶었다면 방으로 돌아가서 쉬면 되었다.
‘엄청 급한 일이 있나 보네.
그게 뭘까?
내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인가?
지금 당장 알 도리는 없었다.
퀘이사는 ‘흐응, 나중에 다시 얘기 해!‘라며 몸을 돌렸고 이사벨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비올라도 그 뒤를 따라 걸으려고 했다.
“비올라는 남거라.”
* 이사벨라의 예상과는 달리 헤론은 대마물과 싸우지 않았다.
눈이 부는 곳에서 힉슨과 목숨을 건 대련을 했을 뿐이었다.
힉슨이 헥헥대며 물었다.
“넌 또 왜 갑자기 이렇게 열심히 수련하냐?”
“가족이 생겼거든.”
힉슨이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저 한 마디에 많은 말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네놈의 변화가 싫지 않구나.’
힉슨이 물었다. “황실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지?”
“그래.”
순간, 땅이 웅웅 울었다. 헤론의 의지에 마나가 반응했고, 그 마나가 진동하면서 미세한 지진을 일으켰다.
“왜? 비올라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대?”
“하얀 벨라투로서 더없이 좋은 제안이겠지. 황실, 그중에서도 셀리나 대신의 직속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으니.”
“이야. 그거 실세 중의 실세 루트아니냐? 벨라투의 경사네!”
만민 위에 황제가 있고 황제 위에 셀리나가 있다. 세계를 다스리는 건 황제이지만, 황제를 다스리는 건 셀리나다.
대륙 전역에 공공연히 떠도는 말이었다.
황제 스스로도 부정하지 않는 말이기도 했고.
“너 그래서 화가 난 거야? 딸이 네 곁을 떠날까 봐?”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군.”
힉슨이 크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 벗의 등을 탕! 탕! 두드렸다.
“넌 아직도 비올라를 그렇게 모르냐?”
“……무슨 뜻이지?”
“에휴, 가봐라. 비올라 돌아올 때 됐잖아.”
헤론과 힉슨은 겨울성으로 향했다. 수비대에게 들으니 비올라가 이미 복귀했단다.
“비올라가 벌써 돌아왔………? 응?”
힉슨이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고 말았다.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었어?”
아무래도 대련 중에는 힉슨 자신을 좀 봐준 모양이었다. 공작이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리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다니.”
아무리 헤론이어도 저런 식으로 움직이면 체력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힉슨은 느긋하게 공작저로 걷기 시작했다.
한편, 음속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공작저에 복귀한 헤론의 날카로운 청각에 이상한 얘기들이 잡혔다. “퀼튼가와 혼인을 맺는 건 벨라투에게도, 퀼튼에게도 좋을 테니. 더더군다나 지지기반이 약한 비올라라면 더더욱.”
그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마침 비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이루어 놓은 것과 키라엘 공자가 이루어 놓은 것. 정확한 비교를 해주시길 바라요.”
헤론은 호흡을 다스릴 시간도 없이 숨 가쁘게 내뱉었다. 머리보다 입이 빠르게 움직였다.
“제안을 거절하지. 비올라는 환영만찬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키라엘과는 격이 맞지 않아.”
그 누구도, 심지어 비올라조차도 헤론의 호흡이 왜 가빴는지 알지 못했다. 헤론의 호흡은 진정되지 않았다.
딱히 진정시킬 생각도 없는 듯했다.
퀘이사와 대화도 나누었다.
“우리가 친했던 때가 있던가?”
“쳇, 안 통하네.”
“좀 쉬고 싶은데.”
“나가달란 뜻이지?”
결국 퀘이사와 이사벨라가 밖으로 나갔고 비올라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헤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 너는 왜 방을 나가려 하지?”
공작은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 비올라는 억울했다.
쉬고 싶다면서요! 나가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