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5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35화

하루 전.

헤론은 메데이아를 호출했다.

메데이아는 조금 의아해서 재차 확인했다.

“서재가 아니라 방으로 호출하셨다. 고?”

“그렇습니다.”

“알겠어.”

서재가 아닌 방으로 불렀다는 것은 후계자 메데이아를 부른 것이 아니라 딸인 메데이아를 불렀다는 의미였다. ‘방에서 아버지와 만났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이 섭섭하거나 서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메데이아는 완벽한 공녀여야 했고, 그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릴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공작’이 아닌 ‘아버지’를 만난다고 생각하자 조금 설렜다. 메데이아는 공작의 방에 도착했다.

공작은 편한 차림으로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네, 후계자 메데이아가 아니라 딸메데이아를 불러주셨으니까요.”

“그게 왜 기분이 좋지?”

메데이아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의 대답이 과연 ‘벨라투’로서 옳은지를 생각해야 했다.

“저에게는 가족이 필요하니까요.”

침묵이 흘렀다. 헤론은 무표정한 얼굴로 메데이아를 바라보았고 메데이아는 헤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메데이아는 어쩌면 아버지가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헤론은 크게 실망한 것 같지는 않았다. “가족이 필요해서 강해지고 싶다는 네 말이 기억나는구나.”

“실없는 소리라고 말씀하셨었죠.”

“그랬었지.”

어렸던 메데이아는 따뜻한 가족을 꿈꿨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그 꿈을 잃었다.

때때로는 마물들이 들이닥치는 겨울성에서 인간다움과 따뜻함은 독이었다.

이곳을 다스릴 자는 철저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했고, 강력한 힘과 정신력으로 겨울성을 이끌어가야 했다.

치열한 후계 경쟁은 그러한 군주를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헤론과 메데이아는 사적인 대화를 길게 가져본 적이 없었고, 당연히 둘의 대화는 매끄럽지 못했다.

“메데이아.”

“네.”

“너는 여전히 나를 아버지라고 생각하느냐?”

헤론은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괴물을 만드는 또 다른 괴물이라고 생각했었다.

“제게 제가 모르는 또 다른 아버지가 있었나요?”

“네 생각을 묻는 것이다.”

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메데이아는 헤론의 질문이 영 이상하다고 느꼈다.

여태까지의 헤론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딸로 생각하시나요?”

메데이아는 그렇게 묻고 나서 조금 두려웠다. 꿈에 젖은 소리는 그만하거라. 너는 나의 딸이기 전에 가장 유력한 후계자 후보다.

이런 말이 나올 것만 같아서 무서웠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너는 나의 딸이다.”

심장을 옥죄던 긴장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버지도 제 아버지시지요.”

“그런가?”

“부정할 수 없고, 부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에요.”

헤론은 또 한참이나 메데이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구체적인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감정이 헤론의 온몸에 가득 들어차서 손끝과 발끝으로 퍼져 나갔다.

헤론 스스로도 이상했다.

아마도 6년 전, 비올라가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이런 감정이 조금씩 들었던 것 같았다.

그때, 메데이아는 책상 위에 놓인 소식지를 발견했다.

‘왜 저렇게 구겨져 있지?’

소식지가 심각한 수준으로 구겨져 있었다. <겨울성의 6공녀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있다?>

내용이 대충은 짐작이 갔다.

“힉슨 아저씨와 관련된 내용이겠군요?”

“알고 있느냐?”

“아저씨는 늘 비올라를 일컬어 ‘마음으로 낳은 딸’이라고 표현했거든요.”

“비올라는.”

순간, 공작성의 유리창이 모조리 깨졌다. 때문에 ‘나의 딸이다’라는 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이후 공작은 명령을 내렸다.

비올라와 마탑의 거지 패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소한 대화까지도 모조리 알아오라고 했다.

메데이아의 집사는 의아해했다.

“이런 잔심부름 같은 업무를 공녀님께 직접 내리셨다고요?”

거지 패와 만나 정보를 수집해 오라니. 메데이아쯤 되는 고급 인력이 맡을만한 임무는 아니었다.

“응.”

그러나 메데이아는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보여준 비올라의 전략은 어마어마했잖아. 역대 가장 뛰어난 하얀 벨라투일걸?”

“그것과 공녀님의 임무와는 상관이….”

“있지.”

집사는 이해하지 못했다. 비올라가 잘한 것과, 메데이아가 그것을 조사하는 게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비올라의 업적을, 제1순위 후계자인 내게 조사하라 말씀하셨어. 그게 무슨 뜻이겠어?”

“글쎄요. 숨겨진 뜻이 있을까요?”

“비올라가 해낸 것을 조사하고 배우라는 뜻이시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1순위 후계 자에게 그렇게 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1순위 후계자가 보고 배울 만큼, 비올라의 업적이 뛰어났다는 뜻이었다.

“비올라를 진정한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을 공표하시는 행동이야.”

“그렇지만 그것을 위하여 공녀님이 이용당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용당하고 싶어.”

“..…예?”

집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가주가 되고 싶지 않아.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겨우 끌어내렸다. “비올라가 뛰어난 후계자 후보라고 생각해. 그 아이가 혹시 나보다 뛰어나다면 그 아이가 후계를 잇게 되겠지.”

사색이 된 집사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가주가 될 거야.”

자신의 강력한 힘으로 억제해야 다른 가족들이 편안해질 수 있다. 절대적인 힘을 갖춘 자신이 있어야 동생들이 피 튀기는 전쟁을 하지 않을 테니.

마음속으로 기대감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비올라라면…… 언젠가 나를 뛰어 넘을 수 있을 거야.

누가 가주가 되든 상관없었다.

강력한 힘으로 가족들을 지탱해 줄 사람이면 되었다.

‘내가 널 도와줄게. 진심을 다 해서.’

비올라는 왠지 모를 으스스함을 느끼며 한참을 이불 속에서 뒤척여야 했다.

*

“비올라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빈민굴의 왕초 케이타룬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을 했다. 저 절대자는 누구지?

왜 나한테 왔지? 뭘 물으려고 하는 거지?

비올라 공녀의 적대세력인가?

라이벌?

아니면 친구?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 말씀하십시오. 아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다 말하겠습니다.”

“비올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는 약자답게 대답했다. “제, 제가 감히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떻게 생각하면 될지 고견을 내려주세요.”

메데이아는 진안을 통해 케이타룬의 공포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절대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그 말에 케이타룬은 더욱 두려워졌다. 마탑에서도 이런 적이 꽤 있었다.

우린 절대로 너희를 해치지 않는다. 협조만 하거라.

이 말에 순종했다가 사라진 친구와 가족이 많았다. 케이타룬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법 발전을 위한 인체실험의 도구로 쓰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의 공포가 떠올라 손발이 달달 떨려왔다.

“당신의 두려움을 이해해요. 내일 다시 올게요.”

하루가 지났다. “저는 그저 제 사랑스러운 동생이 마탑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저희 아버지께서도 궁금해하세요. 딸이 그곳에서 무엇을 했길래 그동안 탈출하지 않았던 여러분들이 겨울성으로 오게 되었는지.”

메데이아는 따뜻한 말로 케이타룬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천천히 조심스레 케이타룬에게 다가갔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케이타룬도 어느덧 마음을 열게 되었다.

케이타룬은 비올라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분은…… 무섭지만 따뜻한 분이셨습니다요.”

비올라에 대해 느낀 점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분이 없었다면 저희의 삶도 없었을 겁니다요.”

겨울성에 와서 그들은 자아를 찾았다. 이곳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저희에게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요.”

그도 소식지를 통해 대략적인 내용을 알게 되었다. 흑경 힉슨과 용병왕 카이저. 아기사슴 용병대까지 동원했다는 사실을 소식지로 접했다.

그는 결국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희 같은 것들이 뭐라고…….”

우리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메데이아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케이타룬에게 전해주었다.

“그대들의 평가는 잘 들었어요. 제 동생을 좋게 봐주어서 고마워요.”

케이타룬을 비롯한 이주민 마탑의 거지 패를 겨울성에서는 이주민이라 불렀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비올라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해낸 것 같았다.

이주민들에게 새 삶을 불어넣어 주었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비올라, 너는 정말.

메데이아는 그날 이후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른이 된 비올라가 다스리는 겨울 성.

그 겨울성은 지금의 겨울성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내가 도와줄게.’

제1후계자인 메데이아는 마음속으로 후계권을 반쯤 포기했다. 진정한 후계자인 비올라를 위해서.

*

와장창!

유리창이 깨졌다.

침대에 누워 있던 비올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게 왜 깨져?’

공작저의 유리창은 모두 대(對) 마물 특화로 제작된 방어 결계 유리창이었다. 어지간한 충격에는 깨지지 않았다.

‘대마물 전조증상?’

방어 결계 유리창임과 동시에 경고 마법이 걸려 있는 유리창이기도 했다. 대마물 중에서도 특히 강력한 상위종들이라 불리는 몇몇 개체가 나타날 때, 그 파장에 맞추어 유리창이 진동하다 깨지게 된다.

‘그건 소설 후반부에서나 나오는데? 그것도 딱 한 번.

그런 대마물이 왜 벌써 나온단 말인가. 그런데 대마물이 나타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대마물이 나타났다면, 아버지가 한가로이 날 찾아왔을 리가 없지.”

헤론이 비올라의 방을 찾아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초검은 계속 익히고 있느냐?”

“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유리창은 왜 깨졌으며, 아버지는 왜 찾아온 건가. 아린조차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네 성취를 봐주도록 하마. 따라오너라.”

비올라는 겉으로 티 나지 않게 쭈뼛대며 헤론의 뒤를 따라 걸어 연무장에 도착했다. 지난 1년간 비올라는 헤론과 가끔 대련을 해왔다.

그러니 이 상황 자체가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초검을 펼쳐 보거라.”

초검을 통해 헤론을 공격했다. 사방에 초검이 휘날리고 날카로운 풀들의 폭풍이 연무장을 뒤덮었다.

비올라는 이를 악물고 헤론을 공격했고 헤론은 여유롭게 비올라를 상대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녹빛으로 물든 잎사귀들의 장막을 헤치고 헤론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비올라.”

여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6년 전. 나는 너를 선택하여 내 딸로 삼았다.”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초검이 힘을 잃고 소멸되어 갔다.

“그리고 7살의 너는 내 딸이 되기로 선택하였지.”

비올라는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싶어 조금 고민했다. 소설 속 헤론과는 행동양식이 묘하게 달랐다.

헤론이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그 선택에 후회가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