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3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33화

대부분의 마탑주가 그렇듯 시르송역시 괴짜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해야 해.’

시르송은 자신의 도발에 풀 죽어서 아무것도 못 하는 대상을 혐오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시르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이어지는 말이 의외였다. “아하! 그래서 용병왕과 흑경을 마탑 밖에 배치시켰군?”

비올라는 혼란스러웠다. 힉슨은 그렇다 치고.

‘카이저가 아직 밖에 있단 말이야?’

시르송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유명한 특급 암살자를 마탑 밖에 배치시켰나?”

예? 그 유명한 특급 암살라니요? ‘셰일란은 아닌데?’

셰일란은 뛰어난 암살자이지만 유명해지기 전에 은퇴해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암살자일 것이 분명했다. ‘누굴 말하는 거야?”

비올라는 몰랐다. 무려 총집사 칼튼이 직접 이곳에와 있을 줄은.

참고로 칼튼은 오래전, 2마탑의 부탑주를 암살했었다.

“최강의 용병대를 진격시켰고.”

용병왕 카이저의 오랜 동료들이자 대륙 최강의 용병대인 ‘아기 사슴용병대’가 이쪽으로 접근 중이었다. 이왕에 친구(비올라)를 도와줄 거면 화끈하게 도와주고 싶다는 카이저의 호의였다.

바깥세상으로 나온 거지 패를 보다 안전하고 확실하게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동대륙 출신의 뛰어난 암살자까지 붙어 있군.”

이건 알 것 같았다. 셰일란이었다.

온통 의문투성이인 가운데 셰일란의 존재만 투명했다.

시르송이 시선을 제논에게로 옮겼다.

“그리고 제논까지.”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또 나를 죽이려 들 텐가?”

“저는 암살자가 아니라 집사랍니다. 탑주님.”

둘이 구면이었다. 소설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전쟁을 치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전력들이로군.”

“마탑을 부수겠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겠어.”

아뇨. 저는 잘 모르는 일인데요.

전 그냥 되바라지게 맞받아쳤을 뿐인데요…?

비올라의 예상과 다르게 상황이 흘러갔다.

“엘시나는 핑계고, 사실은 마탑과 전쟁이라도 하자는 건가? 이 정도 전력이 움직였으면 비올라 공녀의 단독 행동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총집사 칼튼이 직접 움직였을 리는 없다. 시르송은 이번 비올라의 일정에 헤론 공작이 깊숙이 개입한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비올라 공녀와 제논이 나를 암살하고 나면, 바깥에서 저들이 상황을 정리한다는 시나리오인가.”

비올라는 억울했다. 그녀는 그저 베나토의 좋은 어머니 이자 스승님을 섭외하러 왔을 뿐이다.

“마탑을 물로 봐도 유분수지.”

순간, 공간 전체가 바뀌었다. 마나가 풍부했고 사방이 뻥 뚫린 공간이었다.

마탑주답게 완벽한 공간 마법을 구사했다.

“비올라 공녀의 실력을 좀 보도록 하지.”

시르송이 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 죽으면 어쩔 수 없고.”

시르송의 몸 전체에서 마나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카이저는 답답한 듯 가슴을 탕탕쳤다.

“사내놈들이 아주 겁은 많아가지고!”

그랬다가 곧바로 사과했다. “아니, 이봐. 울지 마. 내가 미안하다. 응?”

카이저는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마탑의 거지들은 상상 이상으로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카이저는 힉슨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캣맘, 내가 쟤네 울리면 비올라가 화내겠지?”

“엄청 화내지.”

카이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쟤네를 어디로 안내해야 해?”

“겨울성.”

사실 힉슨은 저 많은 인원을 어떻게 통솔해서 데려가야 하나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고민이 해결되었다. 대륙 최강의 용병대라 불리는 ‘아기 사슴 용병대가 도착한 덕분이다.

그 어떤 산적 무리도 이들을 덮치지 못했다. 아기 사슴 용병대는 수십 명에 달하는 마탑의 거지들을 안전하게 인솔하여 겨울성으로 향했다.

이 이례적인 상황에 수많은 소식지가 해당 내용을 다루었다. 카이저는 호탕하게 웃으며 인터뷰에 응했다.

“으하핫! 친구가 친구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용병왕이 직접 ‘친구’를 언급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소식지의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친구가 누구입니까? 역시 헤론 공작님이시겠지요?”

“헤론? 그게 뭐야?”

그 유명한 헤론 공작이지만 카이저는 헤론에 대해 잘 몰랐다. 그는 늘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았으며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했다. “깬 내 친구 아니야.”

“그, 그럼 누가 친구입니까?”

“비올라라고 있어. 작고 소중한애.”

비올라도 모르는 사이, 비올라의 이름이 대륙 전역을 강타했다. <용병왕의 진실 된 친구, 비올라.>

<아기 사슴 용병대를 움직인 6공녀.>

작고 소중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런데 인터뷰에 힉슨이 난입했다. “내가 마음으로 낳은 딸이기도 하지.”

“아, 아니, 당신은!”

기자들은 힉슨의 얼굴을 알아봤다. 과거 흑경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폐인이 되었다 알려진 무인이었다.

화가 나면 해일을 일으킨다고 알려진 검은 고래.

힉슨이 분명했다.

“흑경 아니십니까!”

“그건 옛 이름이고.”

“지금 이름은 무엇입니까?”

힉슨은 친구이자 라이벌인 카이저를 다분히 의식했다. “좋은 아빠.”

거기까지 말한 힉슨은 어딘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말을 정정했다. “비올라의 아빠.”

친구보다는 아빠가 더 친밀한 것 아니겠어? 힉슨은 그렇게 생각했고, 힉슨과 눈을 마주친 카이저는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

기자들은 빠르게 소식지의 내용을 정리해서 마법 서신을 통해 대륙 전역으로 뿌렸다.

<철혈 공녀를 둘러싼 비밀들.>

<겨울성의 6공녀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있다?>

비올라가 마탑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이, 새로운 소식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비올라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난 입만 털어서 엘시나를 데려오고 싶었을 뿐이라고!’

충분히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아냐. 정신 차리자.

6마탑주 시르송쯤 되는 이가 진심으로 13살짜리 공녀를 상대할 리 없다.

진짜로 죽이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물의 장막.’

물의 장막이 생성되어 비올라의 몸을 덮었다. 일단 방어에 치중하면서 방법을 생각해 볼 요량이었다.

시르송은 보자마자 물의 장막을 읽어냈다.

“정령후를 활용한 방어 기술이라.”

게다가 기적을 일으키는 물인 아레나의 기운까지 느껴졌다. 작심하고 방어만 한다면 저 방어를 뚫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하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너무 큰 힘을 발휘하면 바깥에서 대기 중인 전력이 무슨 소란을 일으킬지 모른다.

적당히 힘을 조절해서 비올라와 싸워야 했다.

그 역시 비올라를 진짜로 죽이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마탑을 대놓고 비웃는 헤론공작의 큰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는 싶었다. “그런데요, 마탑주님.”

물의 장막 속에 있던 비올라조차 흠칫 놀랐다. 평소의 제논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저는 집사임과 동시에.”

그의 몸이 스르르 움직였다. 비올라조차 그의 움직임을 읽어내지 못했다.

“공녀님의 친구이기도 하거든요.”

제논은 카이저를 보며 희망을 얻었다. 카이저 같은 막돼먹은(?) 놈도 비올라의 친구가 되었다.

그러니 자신도 친구가 될 수 있다. 고 생각했다.

“아직 공녀님은 허락해 주지 않으셨지만 말이에요.”

제논의 단도가 시르송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로로 갈라진 시르송의 몸이 풀썩쓰러졌다.

피는 나지 않았다.

시르송의 몸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가 싶더니 빛이 번쩍! 터져 나왔다.

시르송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전보다 실력이 더 늘었군.”

“그렇지요?”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네놈이 어째서 집사 따위를 하고 있는 거냐?”

“함께하고 싶은 분이 계셔서요.”

제논이 비올라 쪽을 힐끗 살펴보았다. 그리고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저 혼내실 건가요?”

집사가 명령도 없이 스스로 움직였다. 그렇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방금은 집사 제논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친구 제논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비올라는 아무도 모르게 침을 꼴깍삼키고 입을 열었다.

“아니, 잘했어.”

다리가 호달달 떨렸다. 두 절대자의 싸움에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여유로운 상태를 유지했다.

“이젠 대화를 좀 할 생각이 생겼나요, 시르송 경?”

비올라는 물의 장막을 거두지 않았다. 물의 장막은 철저한 방어술이다.

시르송에게는 이것이 ‘나는 대화가 하고 싶다’라는 뜻을 어필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시르송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논을 집사로 데려온 이유가 있었군.”

정상적인 대화를 위해서 제논의 존재는 필수였다. 천하의 마탑주조차 함부로 행동할 수 없도록 막아주는 억제제였다.

“마탑주님, 저는 엘시나를 원해요.”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을 테지?”

“허락하실걸요?”

시르송은 인상을 찡그렸다. 어딘지 모르게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진짜 싸우려는 의지는 없는 듯한데.’

이쯤 되니 혼란스러운 사람은 시르송이었다. 분명 헤론 공작이 뒷일을 꾸며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비올라의 태도를 보면 정말로 엘시나가 목적인 것 같기도 했다.

‘일단은 들어나 보자.’

비올라가 검지를 펴며 말을 이었다. “첫째, 마탑의 골칫거리를 밖으로 내보낼 수 있어서 좋고.”

중지 손가락을 폈다. “둘째, 저희는 엘시나를 정식으로 섭외하는 거예요. 제국 3대 공작가 중 한 곳에서 모셔간 마탑의 제자.

모양새가 좋지 않나요?”

엘시나는 어차피 천덕꾸러기다. “마탑의 천덕꾸러기조차도 공작가의 귀한 대접을 받을 정도의 실력자라는 소리가 되잖아요?”

사실관계야 어찌 됐든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럴 것이다. “마탑 중에서는 제일 세가 약한 6마탑에 크게 이득이 될 거예요. 마탑의 밝은 미래를 본 투자자들이 몰려들겠지요. 또한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낸 시르송 경의 능력은 재조명될 거예요.”

시르송은 6마탑의 대외적 이미지에 크게 신경 쓰는 인물이었다. 본인의 명예나 평판에도 민감했고.

“시르송 님이 어떤 내용을 소식지에 담든 관여하지 않을 예정이에요.

가령, 벨라투의 공녀가 직접 와서 애걸복걸했다는 내용을 실어도요.”

듣다 보니 시르송은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 약지를 폈다.

“셋째, 혹시 엘시나가 사고를 치더라도 그것은 고용인인 제 책임이 되겠지요. 완전히는 아니어도 마탑과 책임을 분담할 수 있을 거예요.”

새끼 손가락을 폈다. “넷째, 엘시나 본인도 원하고 있어요.”

비올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봉인했던 마나도 풀어내겠지요.”

엘시나가 마나를 봉인했던 이유는 거지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거지들을 계몽하여 스스로의 자유를 쟁취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이유가 사라진다면, 엘시나가 굳이 마나를 봉인해 둘 필요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엘시나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어요. 엘시나가 높이 성장하면, 그것은 곧 마탑주님의 명예에도 직결되겠죠.”

비올라는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며 물의 장막을 걷어냈다. 시르송의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구미가 상당히 당길 때, 시르송은 저런 행동을 보이곤 했다.

“엘시나를 천덕꾸러기로 방치하느냐, 아니면 훌륭한 제자로서 세상에 내보이며 마탑의 명예를 드높일 것이냐. 그것은 탑주님의 선택에 달려있어요.”

시르송은 속으로 감탄성을 내뱉었다. ‘벨라투가 자랑하는 철혈 공녀라더니, 그 말이 틀림이 없구나!’

진일보된 벨라투라는 소문이 과장이 아닌 것 같았다. 비올라는 시르송이 봐왔던 그 어떤 13살보다 더 똑똑했다.

과거, 메데이아와 비견되었던 엘시나보다 더 총명한 것 같았다.

‘무섭게 성장하겠어.’

10년 뒤. 비올라는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까.

10년 뒤를 상상하니 조금 두려울 지경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시르송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도록 하지요, 공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