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7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27화카이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나 같은 게 어떤 건데?”

“맞아도 안 죽는 거.”

세계관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만큼 단단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였다.

죽을 만큼 맞아도 안 아프고 어지 간한 마법은 그냥 신체 능력만으로 튕겨낸다.

하급 무인의 검은 피부는커녕 피부 바깥에 흐르는 마나장을 뚫지도 못하고, 상급 무인이라 할지라도 카이저를 다치게 만들기는 어려웠다.

“보통은 맞으면 죽는다는 거. 알고 있지?”

“알지. 내가 바본 줄 알아?”

“그러니까 두려운 게 당연한 거야.

모두가 아저씨 같지 않아.”

카이저는 타닥! 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약간 생각에 잠겼다.

아주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말해줬었다.

‘얘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 같지는 않단다. 너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렴.”

‘왜요, 어머니?’

‘강자의 시선으로 보면 약자는 답답하거든. 약자의 시선으로 보아야 세상이 따뜻하단다.

‘알겠어요, 어머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이를 먹으면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약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봐.”

카이저의 몸이 움찔했다.

“너 우리 엄마랑 친구였어?”

“…….”

비올라는 진심으로 황당했다.

13살에게 엄마 친구냐니.

어떻게 보면 참 편견 없는 타입인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엄마랑 똑같은 소리를 하길래.”

“아무튼. 나는 마탑에 비해 약자였고, 내 나름의 방식으로 마탑으로 들어가려고 했어.”

“왜 들어가려는 건데?”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 있어. 꼭 찾아야 할 사람이 있거든. 그런데 아저씨가 나타나서 모조리 망쳐 버린 거야. 나를 구하겠다는 아저씨의 이기심을 앞세워서.”

카이저는 민망하듯 코를 슥슥 문질렀다.

“말이 좀 심하다?”

“맞잖아. 전후 사정은 알아보지도 않고 대뜸 마탑을 향해 철퇴를 휘둘렀잖아. 손해배상은 우리 가문의 몫이 될 거고.”

“나한테 해야지, 왜 너네 집에 해?”

“아저씨가 배상해 줄 거야?”

“나 돈 없어. 배 째라 그래.”

“그러니까 벨라투에 하겠지.”

마탑 입장에서는 그게 훨씬 빠르고 간편한 길일 테니까.

카이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벨라투?”

아까도 벨라투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건만 카이저는 늘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듯했다.

“너 벨라투야?”

“응. 6공녀.”

카이저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근데 벨라투가 어디에 있는 가문이더라?”

“북방 끝에 있어.”

“내가 들어봤으니까 중소 가문은 아니겠다?”

“모나크 제국 3대 공작가는 알아?”

“공작가가 3개밖에 없어?”

비올라는 대화를 하면 할수록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태어난 김에 그냥 살아가되 단백질에만 미쳐있는 근육쟁이와는 상식적인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비올라는 카이저 눈높이에 맞추어서 가르쳐 주었다.

“아저씨는 닭가슴살에 환장하지?”

“세상에서 제일 완벽한 음식이지.

100g에 단백질이 20g 넘게 들어 있으면서 칼로리는 130kcal밖에 안된다고.”

참고로 이러한 성분 분석이 가능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6마탑주 시르송의 낙오된 제자.

6마탑의 천덕꾸러기이자 지금 비올라가 만나러 가는 사람.

바로 엘시나의 성분 분석 마법 덕분이었다.

“그리고 팬케이크는 싫어하고.”

“그건 악마의 음식이야.”

“나는 팬케이크를 엄청 좋아해.”

“오우. 악마 같은 꼬맹이.”

카이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팬케이크를 좋아하는 13살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어떤 면에서는 편견 없이 열린 사고를 보여주었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편협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팬 케이크를 아저씨한테 선물하면 어때?”

“꿀밤을 때릴 거야. 그딴 건 선물이 아니니까.”

“아저씨가 나한테 준 게 그래. 아저씨의 행동은 내게 생크림을 얹은 팬케이크였다고.”

카이저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이제야 마음으로 공감하고 이해한 것 같았다.

“미안하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니?”

*

총집사 칼튼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아주 먼 곳에 숨어 그의 고유 능력인 ‘천리안’을 통하여 비올라 쪽을 훔쳐보는 중이었다.

‘용병왕 카이저가 저렇게 순순히 군단 말이야?’

비올라의 마성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저 아이의 용병술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갑자기 마탑을 찾아간다는 것부터가 계획된 일이었구나.’

비올라 공녀는 다 계획이 있었다.

용병왕 카이저의 이동 동선을 철저히 파악하고, 그의 심성과 성격을 완벽하게 분석한 뒤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 용병왕 카이저는 반드시 섭외해야 하는 대상이지.’

적이 되면 가장 골치 아플 인간 중 한 명이다.

반대로 아군이 되면 가장 든든한 사람 중 한 명이고.

다루기가 까다로워서 그렇지, 일단 다루기만 한다면 최고의 전력이 되어줄 인물이기도 했다.

‘겨울성 외부에서도 입지를 탄탄히 쌓아 가는구나.

확실히 비올라는 대단했고 야망이 엄청났다.

칼튼은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용병왕 카이저라면…… 유사시를 대비하여 나를 파견 보내실 만하지.’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

밤이 깊어갔다.

비올라는 생각해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마탑에 잘 들어갈 수 있을까.

오해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엘시나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다.

6마탑에서 외부인과의 만남 자체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는 동안 아저씨 머리를 잘라서 가져가면 출입을 허가해 줄 거 같기도 하고.”

“넌 무슨 귀족 영애가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냐?”

카이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좋아. 그럼 내가 직접 가서 오해를 풀어주지!”

“어떻게?”

“사실대로 말해야지.”

“사실대로 말하기 전에 통구이가 될 수도 있어.”

“닭가슴살 가져가면 한 번에 익혀 주나?”

아무튼 카이저의 논리는 이러했다.

“너랑 내가 아까까지는 친구가 아니었고, 이제는 친구가 되었다고 말하면 되지 않겠냐?”

저 꽃밭을 어이할꼬.

비올라는 또 할 말을 잃었다.

“우리가 왜 친구야?”

“닭가슴살을 나눠줬잖아.”

영문은 모르겠지만 제논에게는 냉동된 닭가슴살이 있었다.

비올라는 그 닭가슴살을 카이저에게 건네주었고, 그는 닭가슴살 1g을 한 자리에서 먹어치웠다.

밤이 더욱 깊자 카이저는 코를 골며 잠들어 버렸다.

‘ ‘내가 제일 잘나가’라며 잠꼬대를 하면서 말이다.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공녀님. 제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혹시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푸른 달빛을 받아 제논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미소는 오늘따라 조금 더 살벌해 보였다.

비올라가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너 설마. 독 썼어?”

용병왕 카이저가 갑자기 잠든 이유.

왠지 알 것 같았다.

알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네, 붉은 개구리의 신경독과 향리 아누 고래의 기름을 일정 비율로 섞은 뒤 마법 압착기를 통해 극압 공정을 거친 독을 사용했어요.”

처음 이 독을 만든 사람인 바탈루의 이름을 따서 ‘바탈루’라고 불리는 독이었다.

“바탈루?”

비올라도 아주 잘 알고 있는 독이었다.

한 방울이면 오우거도 쓰러뜨린다.

대신 특유의 맛이 강하여 기습에 유리한 독은 아니었다.

“역시 알고 계셨네요.”

“맛이 엄청 센 독이잖아.”

매일같이 닭가슴살을 먹는 카이저가 모를 리 없었다.

다시 말해, 카이저는 이 독이 들어있는 것을 알고 그냥 먹었다는 소리였다.

“글쎄요. 제가 줬으면 안 먹었겠지만 공녀님이 주셔서 먹은 것 같아요.”

아까의 상황을 떠올려봤다.

저 말이 맞기는 했다.

제논이 아공간에서 꺼낸 닭가슴살을 받아 비올라가 전해줬었다.

‘어린이가 주는 음식은 무해하다… 라는 논리겠네.’

그것이 설령 극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한결같은 캐릭터에 비올라는 혀를 내둘렀다.

“목을 자를까요?”

“됐어. 자르기 전에 깰 거야.”

아니.

자면서도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 듣고 있으면서도 그냥 신경 안쓰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용병왕 카이저는 그런 캐릭터다.

“라스본 빙검식이라면 고통 없이 해낼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제논.

그렇게 웃는 얼굴로 살벌한 말 좀하지 말아주라.

나 진짜 무섭단 말이야.

비올라는 호달달 떨리는 다리를 감춘 채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신뢰를 보여주었잖아.”

“신뢰요?”

“바탈루를 알면서도 그냥 먹었어.

그게 신뢰가 아니면 뭐야?”

“흠. 그건 그렇네요.”

“그러니까 나는 이자의 머리를 자를 수 없어.”

일단 머리를 자르는 것부터가 싫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신의를 배신할 수도 없을뿐더러, 나는 이 아저씨가 마음에 들었거든.”

순간, 카이저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러고는 음냐음냐-잠꼬대를 해댔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었으나 비올라는 그걸 분명히 봤다.

“친구로 인정하신 겁니까?”

“먼저 친구라고 말해줬잖아. 나한테 그런 사람은 잘 없잖아.”

제논은 ‘제가 있잖아요. 제가 좋은 친구가 되어드릴 수 있어요’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비올라가 원하는 건 친구 제논이 아니라 집사 제논이었으니까.

한편, 비올라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니, 용병왕 씨.

자꾸 왜 히죽히죽 웃는데.

잠을 잘 거면 자고, 웃을 거면 웃고, 둘 중에 하나만 하라고.

엄청 기괴하니까.

비올라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마탑으로 들어가는 다른 방법을 찾을 거야.”

“방법을 이미 생각해 놓으신 모양인데요?”

“응.”

차선책으로 쓰려고 했던 방법이 있다.

“별로 내키는 방법은 아니지만.”

벌써 써버리기에는 조금 아쉬운 패였다.

루이바르텐가의 카를로 수석 디자이너와 6마탑주 시르송이 깊은 친분이 있으니 카를로의 도움을 얻어 보기로 했다.

카를로의 서신이라면 마탑으로의 입장 정도는 허락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날 밤, 카를로 수석 디자이너가 모습을 드러냈다.

“6마탑으로 향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왔습니다. 오늘 낮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지요?”

서신을 보낸 적도 없는데 알아서 찾아왔다.

비올라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 늙은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쁩니다.”

카를로는 진심으로 기쁜 듯했다.

마치 비올라를 위해서라면 지옥 불에라도 뛰어들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아참. 그리고 정말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갑자기 넙죽 절을 했는데, 여전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비올라는 얼떨결에 치맛단을 붙잡고 허리를 마주 숙였다.

얼마 후.

카를로가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을 때, 비올라는 카를로가 이토록 굽신거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헐. 이거 실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