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0


제목이 너무 잘못 전달되었네. 120화에서 비첸은 연무장에서 한 바탕 땀을 흘린 후 기다란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옆에 같이 앉은 툰드라를 불렀다.

“야, 멍멍아.”

이건 보통은 심각한 결례가 될 새끼 말이었지만 툰드라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네, 공자님.”

“너는 비올라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툰드라의 눈에는 자부심의 빛마저 반짝였다.

비첸은 왠지 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비올라에게 트롤 머리를 선물했잖아. 너도 알지?”

“예.”

“그때 비올라가 좋아했어?”

“싫어했습니다.”

“왜 싫어했어? 역시 트롤이 너무 약한 녀석이라 그런 거지?”

툰드라는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은 그런 품위 없는 선물 원치 않으십니다.”

“품위 없어? 왜?”

“피 냄새를 좋아하지 않으시거든요.”

“엥? 왜?”

“그냥 싫어하십니다.”

비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럼 오우거의 머리는?”

“그건 더 싫어하셨습니다.”

“왜?”

“더 역한 냄새가 났으니까요.”

비첸은 약간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이번에 툰드라에게 정통 공격을 허용한 것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진짜 싫어했어?”

“예.”

“얼마만큼 싫어했어?”

“아주 많이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제가 거짓말할 이유가 있습니까?”

비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네가 마음에 좀 안 들기는 해도, 거짓말하는 녀석은 아니지.”

“저도 공자님이 마음에 안 들기는 합니다.”

툰드라는 비첸이 ‘멍멍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고, 반대로 비첸은 툰드라가 직설적이고 예의 없게 말하는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사용인들이 둘의 대화를 들었다면 기함했겠지만 이들은 익숙한 일이었다.

“근데 말이야.”

비첸이 히죽 웃었다.

지금까지와는 표정이 달라졌다.

당장 검을 휘두를 것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툰드라는 마음속으로 기습에 대비했다.

“세나인지, 소나인지. 걔.”

“세나입니다.”

“그래 아무튼 걔. 걔도 그럼 이거 싫어하려나?”

아공간에서 트롤의 머리를 꺼냈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겁할걸요?”

“그래?”

“기절할 수도 있습니다.”

중앙 귀족의 영애들에게는 그런 건 혐오를 넘어 공포스러운 물체일 테니까.

상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비첸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내 소중하고 귀한 전리품이니까 선물로 줘야겠다. 마차에 넣어놔야지.”

비첸은 마치 소악마처럼 킬킬대며 웃었다.

트롤의 머리에서 녹색 피가 뚝뚝 떨어지고, 여전히 눈이 꿈뻑거리고 있었다.

“그냥 넣어놓는 건 안 됩니다.”

툰드라는 오랜만에 비첸에게 협조적으로 굴었다.

“정식 절차를 밟아서 선물을 전해야 하는데, 제논에게 말하면 처리해줄 겁니다.”

*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좋은 선물을 준비하셨군요. 세나 영애도 즐거워하시겠네요.”

“그렇지?”

“예. 쓰리 헤드 트롤의 머리라니.

상당히 진귀한 선물이네요.”

“맞아. 이렇게 귀한 걸 선물하려니 좀 아깝긴 해.”

비첸은 전혀 아깝지 않은 태도였지만 제논은 그런 태도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집사부를 통해 마리앙투에 기별을 넣겠습니다. 쓰리 헤드 트롤의 머리에 독이나 환상계열 마법 같은 것만 없다면 별다른 문제 없이 통과될 겁니다. 서프라이즈 선물이라고 하셨지요?”

“응. 맞아. 깜짝 선물.”

“그렇다면 마차 안에 몰래 넣어둘 명분도 충분하군요.”

제논은 즉시 절차를 밟았고, 마리앙투 측에서는 조금 떨떠름해했지만 비첸의 선물을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잠깐 회의를 거쳤다.

“비첸 공자는 비올라 공녀에게도 선물했다고 하더군요.”

“세 개의 머리 중 하나는 본인이, 또 하나는 비올라 공녀에게, 또 하나는 세나 공녀에게 선물한 것이군요.”

“예. 겨울성의 풍토인 듯하니 존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사과하러 온 을의 입장도 아닌가.

비첸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했다.

제논은 마리앙투 수호 기사들의 참관 하에 마리앙투의 마차로 향했다.

그 중 천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수호 기사 중 한 명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천장 공사를 새로 해야겠어요. 결로가 발생했네요.”

제논은 태연하게 수첩을 꺼내 메모했다.

한편, 천장에 은신해 있던 셰일란은 크게 한숨을 들이마셨다.

‘어우. 뭔 놈의 기감이 암살자 뺨쳐?’

제논 저 녀석은 괴물이었다.

‘뭘 하는 거지?’

뭔가를 마차 속에 넣어두는 것 같았지만 그것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한바탕 소란이 이어진 뒤, 셰일란은 조심스레 착지했다.

마법 등은 꺼진 상태였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퀴에 손상을 입히면 너무 큰 사고가 벌어지겠지?’

감히 내 꿀 같은 고용주, 아니, 제자님을 그렇게 모욕하고 핍박했단 말이지.

셰일란은 참지 않기로 했다.

‘의자만 좀 손봐놓자.’

거리를 두고 의자가 무너지도록 충격을 주기로 했다.

‘많이 아플 것이다, 후후.

그는 암살자로서 고등 훈련을 받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셰일란이 마차 문을 열었다.

‘억? 이게 뭐야.

역한 냄새와 함께 트롤의 머리가 보였다.

겁쟁이 암살자인 셰일란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후,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놀래기는 했지만 왠지 기분은 좋아졌다.

세나는 아마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까무러치겠지.

‘좋아. 이 정도면 됐겠어.’

이틀 정도 있으면 폭삭 주저앉을 것이다.

‘엉덩이가 아파 엉엉 울거라! 많이 아플 것이다, 소냐!’

소냐가 아닌가?

이름이 좀 헷갈리긴 했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긴장이 풀어진 셰일란은 손을 탁탁 털며 마차 문을 열고 나왔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셰일란 경. 여기서 뭘 하고 있죠?”

*

메데이아는 비올라에 대해 궁금했다.

어떻게 그렇게 단시간에 강해질 수 있었는지, 초검이 과연 무엇인지, 그래서 셰일란을 찾았다.

‘뭐 하는 거지?’

셰일란이 마차에 무슨 짓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의자를 손본 것 같은데…

암살자들은 보통 다재다능한 편이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상대를 암살하고 함정을 파는 것이 주특기니까.

분명 의자에 수작을 부려놓았다.

“셰일란 경. 여기서 뭘 하고 있죠?”

“아, 그게……”

셰일란은 순간 당황했다.

이제 그는 은퇴했고, 현역이 아니었다.

마음가짐이 해이해져서 당황한 기색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났다.

메데이아가 빙그레 웃었다.

“동대륙 출신의 무인으로서, 중앙귀족들의 마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호기심이 일었던 모양이지요?”

“그, 그렇습니다. 하하, 하하핫!”

셰일란은 속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못 봤나?’

체포되면 큰 외교적 문제가 될 행동이었으니까.

‘못 봤나 보다, 다행히.’

메데이아가 말했다.

“잠시, 제 방으로 가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

“예……? 제자님의 초검이 그랬다고요?”

결투 내용을 듣게 된 셰일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메데이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셰일란이라면 명쾌한 설명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셰일란 경에게도 놀라운 일인가 보네.’

셰일란도 비올라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화에서 얻을 수 있었던건 하나였다.

‘스승인 셰일란 경조차 경악할 만큼의 성장 속도구나.’

그 외에 큰 소득은 없었다.

셰일란에게 결투 참관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가 직접 비올라를 봤다면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메데이아는 힉슨을 찾기로 했다.

“집사, 힉슨 아저씨는 어디에 있어?”

“비올라 공녀님의 방에서 다과를 즐기고 계십니다.”

“힉슨 아저씨는 다과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요즘은 종종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메데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 편으로 만들었구나.”

메데이아가 걸음을 옮기자 집사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비올라한테.”

“기별을 넣을까요?”

“아니. 됐어. 그냥 갈래.”

기별을 넣으면 공적인 관계가 되는 것 같아 싫었다.

메데이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비올라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방 안에서 크하하핫! 하고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을 잃은 이래로, 힉슨이 저렇게 크게 웃는 건 거의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비올라. 언니야.”

문이 열렸다.

비올라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언니? 어쩐 일이세요?”

“그냥. 내 동생이 보고 싶어서.”

메데이아는 비올라와 힉슨 사이 의자에 앉았다.

“비올라 옆자리는 제가 앉아도 되겠지요, 아저씨?”

“왠지 안 된다고 하면 크게 화를 낼 것 같은 건 기분 탓이냐?”

“기분 탓일 거예요.”

사실 비올라는 쉬고 싶었다.

결투가 너무 어이없이 끝나서 머리가 복잡한데, 힉슨과 메데이아가 거의 동시에 찾아왔다.

분명 결투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인자하게 보이지만 사실 살벌하고 여유로운 –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힉슨 아저씨는 비올라가 어떤 힘을 펼쳤는지 읽으셨지요?”

“너도 읽지 않았어?”

“제가 아직 아저씨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잖아요.”

“1성 기사께서 겸손하시긴.”

“사실인걸요. 게다가 아저씨는 젊은 시절부터 많은 경험을 하셨고, 오늘의 결투에 대한 안목도 저보다 높으실 거예요.”

비올라는 잠자코 따뜻한 코코아를 마셨다.

오늘은 딸기 에이드보다 뭔가 코코아가 더 땡겼다.

힉슨이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했다.

“비올라의 정령 친화력과 정령후의 힘, 그리고 마도 명장들의 아티팩트와 살성의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기적을 만들어냈던 것 같아.”

“기적이요?”

“그래. 저 나이에 저런 검술은 기적이지. 나도, 헤론도, 저 나이 때 저렇게는 못했어. 너도 저 나이 때에는 저 정도는 아니었지.”

콜록, 콜록!

비올라는 헛기침을 했다.

마시던 코코아를 전부 뿜을 뻔했다.

뭔가 일이 아주 잘못되어가는 것 같았다.

“저도 비올라의 나이에, 저 정도의 성취를 보여주지는 못했어요.”

메데이아가 자상한 표정으로 비올라를 쳐다보았다.

“왜 여태까지 그런 힘을 꼭꼭 숨기고 있었니?”

힉슨도 질문을 더했다.

“어떻게 그렇게 기상천외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거냐? 나도 몰랐다.”

나도 몰라요!

나도 내가 이렇게 센지 몰랐다고요!

연습할 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사실 결투 결과가 가장 황당한 사람은 비올라였다.

‘뭐라고 대답하지?’

몰랐는데 그냥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비올라는 천천히 코코아 잔을 내려놓았다.

“그건…….”

치마 밑.

달달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