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8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18화
정신을 잃은 셀빈은 꿈을 꾸었다.
종종 꾸는 꿈이었다.
5년 전 끔찍했던 그 경험은 악몽이 되어 셀빈을 지독히도 괴롭혔다.
한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모두 죽여!’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
‘이자들은 브란디아의 협력자들이다.’
피어오르는 불길.
제발 살려달라고 비는 중년 여자는 눈앞에서 남편을 잃었다.
한 어린아이는 무자비하게 짓밟힌 뒤 칼에 찔려 죽었다.
셀빈은 장롱 속에 숨어 바들바들 떨었다.
‘이곳에 브란디아의 혈육이 있을 것이다! 반드시 찾아내라!’
저들이 찾는 것은 셀빈이었다.
장롱 속에 숨은 셀빈은 입을 틀어 막고 울었다.
그날은 부모님 몰래 도망쳐 나왔다.
공작저는 늘 답답했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수련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 때문이야.’
자신에게 수프를 대접해 주었던 중년 부부는 죽었다.
중년 부부는 셀빈을 숨겨주며 이렇게 말했었다.
‘저기 숨어 있으렴.’
그게 중년 부부의 유언이었다.
셀빈은 그날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사람들이 죽는 것도 공포였지만, 이 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너무나 끔찍했다.
그런데 그때 기적처럼 누군가가 등장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메데이아 벨라 투, 겨울성의 1공녀였다.
그녀는 무미건조한 눈동자로 대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메데이아는 바람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서방의 무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셀빈은 무엇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장롱 속에서 기어 나와 메데이아를 훔쳐보았다.
‘아…!’
흩날리는 검은 단발.
루비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
방금까진 포식자였던 서방의 암살자들은 이제 피식자로 전락해 버렸다.
메데이아 앞에서 저들은 한낱 개미떼에 불과했다.
압도.
그 한 단어가 저토록 잘 어울리는 여인이 있을까.
그 여인이 입을 열었다.
“일어나렴.”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셀빈에게는 따뜻하게 들렸다.
“귀족의 아이로구나.”
메데이아는 셀빈의 얼굴을 알아보지는 못했으나 귀족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고된 수련을 받아왔다는 것도 읽어냈다.
그로부터 저 아이가 아마도 셀빈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브란디아의 혈육들은 성장 속도가 남다르다고 하더니.’
4살에 불과한 이 어린아이가 겉으로 보기에 8살은 되어 보였다.
메데이아가 말했다.
“눈을 크게 뜨고 보거라. 진실과 책임을 외면하는 순간, 귀족의 생명도 끝나는 것이니.”
셀빈에게 그 말은 마법처럼 다가왔다.
용기가 생겼다.
눈을 크게 뜨고 이 끔찍한 장면을 모두 눈에 담았다.
너무 무서워서 온몸이 떨렸지만 눈을 감지는 않았다.
하얀 삭풍이 불어 닥치고 이 마을에 닥친 재앙을 모두 잠재웠을 때, 메데이아가 셀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했구나. 용기는 그렇게 얻는 거야.”
메데이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어린 셀빈과 눈을 마주쳤다.
“언젠가 그 두 발로 당당히 서서, 힘이 없는 자를 지켜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네 이름을 알려주렴.”
따뜻한 가시가 박힌 말이었다.
아까까지의 셀빈은 용기가 없었고 귀족으로서 할 일을 하지 못했다.
이름을 밝힐 자격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메데이아는 스스로의 이름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셀빈의 이름을 묻지도 않았다.
셀빈의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언젠가 꼭 이름을 알려드릴 거예요.”
오늘처럼 무력하게 숨어 있지 않을 것이다.
“언니처럼 될 거예요.”
“그래.”
메데이아는 셀빈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준 뒤, 몸을 일으켰다.
“아.”
메데이아가 한마디를 더했다.
“저들이 찾는 사람은 셀빈 영애라고 하더구나. 혹시라도 영애를 만나게 된다면 알려주렴. 오늘의 이 참상은 셀빈 영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전해줘.”
그러고서 메데이아는 유유히 사라졌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얼마 후, 제국에서 헨서라는 1급기사가 조사관으로 파견되었다.
셀빈은 그녀가 보았던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메데이아는 1성기사가 되었다.
서대륙 특급 암살자 122명 몰살.
<벨라투 1공녀. 1급 기사의 지위를 부여받다!>
<메데이아. ‘서른두 번째 별을 하사받다.>
소식지는 메데이아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고, 어린 셀빈의 가슴속에 메데이아가 가득 찼다.
근데….’
본래는 메데이아의 얼굴이 있어야 했다.
꿈에는 늘 메데이아가 나타났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연보라색 머리카락.
붉은 기운을 머금은 보라색 눈동자.
‘헉!’
셀빈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꿈에서 본 사람은 메데이아가 아니라 비올라였다.
폴투아가 물었다.
“정신이 좀 드니?”
“비올라 언니를 좀 만나봐야겠어.”
“왜?”
“나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것 같아.”
폴투아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어차피 어린애가 하는 말이니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진지한 척 물어보기는 했다.
“왜?”
“눈앞에 보이는 이상향이잖아.”
셀빈에게 있어서 메데이아는 마치 신기루와 같은 존재였다.
존재하지 않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
눈에는 보이지만 다가갈 수 없는 환상.
그러나 비올라는 조금 달랐다.
만지려면 만질 수 있고, 다가서려면 다가설 수 있었다.
“나는 분명히 느꼈어. 비올라 언니와 내 격차를.”
“…..”
“지는 건 부끄러운 게 아냐.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격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거지. 삼촌도 그렇게 가르쳐 줬잖아.”
“그렇게 가르쳐 주기는 했지.”
그렇다고 상대를 사랑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폴투아는 그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감수성 예민한 시기이니 말을 가렸다.
“비올라 언니와 메데이아 언니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어.”
비올라는 자신보다 훨씬 더 강자였다.
여유롭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 자신을 배려하여 싸워주었다.
‘비올라 언니가 이렇게까지 마음놓고 나를 압도할 수 있었던 건, 메데이아 언니가 있기 때문이겠지.’
비올라는 메데이아를 믿었을 것이다.
그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메데이아는 모든 것을 책임져 줄 것이다.
그래서 믿고 최선을 다해주었다.
메데이아는 그 믿음에 응답해 주었다.
두 자매의 모습은, 셀빈이 꿈꾸는 이상향이었다.
‘그리고 그 반지.
그 반지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셀빈은 느꼈다.
자신은 감히 감당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포한 아티팩트였다.
“비올라 언니는 내가 그 반지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았겠지?”
“…음, 아마도?”
그런 반지는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폴투아 역시 반지에 담긴 미증유의 힘을 읽어냈다.
“그런데 내게 반지를 건네주었다는 것은, 나를 그만큼 인정해 준다는 소리 아니겠어?”
얘기가 왜 또 거기까지 가냐.
폴투아는 어린 소녀의 감수성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언니는 내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을 다 보여주었어.”
“…….”
“나를 배려하는 방식으로 나와 언니 사이의 어마어마한 실력 격차를 보여주면서도 내게 손을 내밀어준 거야.”
셀빈은 그녀만의 꿈을 꾸었다.
“이제는 내가 손을 내밀 차례야.”
그녀 좋을 대로 모든 것을 해석해 버렸다.
*
“나, 언니한테 반해도 돼요?”
당돌한 9세의 질문에 비올라는 두통이 밀려들어 왔다.
원작 속에서 셀빈은 메데이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언니한테 반했어요.”」
그리고 사생팬을 자처하며 메데이아의 발자취를 좇는 캐릭터로 성장한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셀빈을 보며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압도적으로 이겨버렸어.’
강한 언니에 미쳐 있는 셀빈이다.
아무래도 셀빈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 훨씬 낫기는 한데.’
아무래도 사생팬은 좀 부담스러웠다.
‘어차피 난 메데이아 언니보다 훨씬 약하니까.’
언젠가 셀빈도 더 강한 메데이아를 졸졸 따라다니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무래도 세나는 미친년인 게 틀림없어요.”
……편해지려던 마음이 다시 불편해졌다.
뒤에 서 있던 폴투아가 크흠, 헛기침을 했다.
“셀빈 공녀. 말을 좀 가려 하시는 것이…….”
셀빈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언니 앞에서는 얌전하고 착한 모습을 보여주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뒤 말을 가렸다.
“제가 언니한테 패배했으니까, 세나는 언니한테 공식적으로 사과하겠죠?”
“그렇겠지.”
결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세나 공녀는 직접 벨라투가를 방문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해야만 했다.
그게 귀족의 법도였다.
“언니를 모욕한 것도 모자라 감히 결투 신청까지 하다니. 아주 못된 심보를 가진 것이 틀림없어요.”
도대체 뭐라고 대꾸해 줘야 할까.
비올라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어제의 셀빈과 오늘의 셀빈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아참. 그리고 이사벨라 공작 부인 이 저한테 뭘 좀 줬는데요.”
“뭘?”
“이거요. 포션, 물의 마술사님이 만든 포션이래요.”
폴투아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셀빈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다 말해주려는 듯했다.
‘괜찮………겠지.’
어차피 이사벨라 공작 부인도 비밀로 하려던 것 같지는 않았다.
포션을 사용했다면 어차피 들킬 일이었다.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한 적도 없었고, 어쨌든 셀빈은 벨라투에서 지내겠다며 투정을 부렸고, 결국 세나 공녀가 이곳에 도착하여 사과하는 시점까지는 투숙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
마리앙투 공작가의 행렬은 화려했다.
백마 두 마리가 이끄는 호화스러운 마차를, 수십 명의 호위기사가 겹겹이 둘러싸고 호위했다.
“곧 겨울성에 도착합니다.”
세나는 이곳에 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비옥하고 평화로운 마리앙투 공작령에서 벗어나 이토록 척박하고 외진 북방 땅까지 오게 되다니.
마물과 매일같이 싸워대는 불쾌한 곳에 오다니.
마차 창문을 열어보았다.
‘바람조차 야만스러울 건 뭐람.’
어딘지 모르게 야만인들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교양이라고는 쥐뿔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 바람도 저질스러울 수밖에.
“겨울성 외벽의 남문을 통과하겠습니다.”
미리 약조되었던지라 수속 절차는 어렵지 않았다.
마차 밖으로 꾀죄죄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불결하고 지저분하구나.’
대체적으로 그러하였다.
세나 공녀의 눈으로 본 아이들은 더러웠다.
몇몇 아이는 나무로 만든 칼로 칼싸움 놀이를 하고 있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 할 시기에 저런 막돼먹은 칼싸움질이라니.’
아무튼 적응되지 않는 곳이었다.
꼬맹이 중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우와! 엄청 예쁜 누나다!”
그 말에 세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창문을 닫아버렸다.
만약 이곳이 겨울성이 아니었다면 불러다가 호되게 혼을 냈을 것이다.
감히 평민 따위가 공작 영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저따위 망발을 저지르다니.
‘겨울성의 수준이 이따위밖에 안된다는 거지.’
굉장히 불쾌해졌다.
“공작저에 도착하였습니다.”
세나는 빨리 사과하고 이 더러운 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눈에 익은 집사 한 명이 세나를 안내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미남자였으며, 벨라투에서 보기 드물게 예의와 매너를 갖춘 자였다.
“제논 집사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공녀님.”
“비올라 공녀에게 안내해.”
제논이 빙그레 웃고서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숙인 제논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비올라 공녀님의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얼마 후, 제논이 방문을 두드렸다.
“비올라 공녀님. 세나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세나는 황당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