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3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13화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요, 부인.”

“네. 말하세요.”

“제가 보고를 올리는 건 상관이 없는데, 크게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그건 제논 집사가 판단할 일이 아니네요.”

이사벨라는 천천히 걸어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보고를 안 하면 안 했으되,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기다려 주었다.

제논에게도 마음의 준비가 조금 필요하겠지.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제논이 결국 입을 열었다.

“해당 보고는 본래 공작님께만 비밀스레 올리려고 했던 보고입니다.

이해하시지요?”

“그래요. 공작님이 안 계신 지금은 제가 공작님의 권한을 대행하고 있으니, 제논은 제게 보고를 올려도 괜찮습니다. 공작님도 충분히 이해 하실 겁니다.”

제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께서 비올라 공녀님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시는군요.’

그것이 제논에게는 뿌듯함으로 다가왔다.

겨울성의 실질적 이인자인 이사벨라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니까.

“제논. 제가 얼마나 더 기다려 줘야 하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논은 크흠, 헛기침하고서 말했다.

“비올라 공녀님은 현재 매우 깊이 잠이 드신 상태입니다.”

이사벨라가 고개를 까딱 끄덕였다.

과연, 저 유능한 집사가 어떤 보고를 올릴지 기대되었다.

“그리하여 저는 제 두 달 치 월급을 쏟아부어 사일런트 마법과 테라 피 마법을 사용한 상태입니다.”

“그래서요?”

“그리하여 매우 편안한 잠에 빠져 들었으며, 머리카락을 질겅질겅 씹고 계십니다. 아마 좋은 꿈을 꾸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꿈속에서 에그타르트를 드시고 있으실지도 모를 일이지요.”

이사벨라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게 공작님께 드릴 보고였다고요?”

“네.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그래요.”

이사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논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숨겨진 속뜻이 있겠네.

공작과 제논 사이의 약속된 은어가 존재할 것이다.

깊은 잠. 사일런트 마법. 테라피마법. 이런 키워드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겠지.

“비올라가 공작님께 꽤 큰 신임을 받고 있는 것 같군요.

비올라의 집사인 제논과 은어를 만들어서 보고를 주고받을 정도이니 말이다.

“보고를 올렸으니, 저는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그래요. 좋은 정보 고마워요. 제가 잘 기록해 두었다가 공작님이 돌아 오시면 전달할게요.”

제논이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이사벨라는 제논의 입가에 서린 미소를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사벨라는 완벽하게 확신했다.

‘분명해.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후계 경쟁에 큰 폭풍을 불러올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논의 말을 떠올렸다.

‘제가 보고를 올리는 건 상관이 없는데, 크게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이사벨라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크게 실망할 보고를 공작에게 할 리 없다.

‘반드시 알아내 주마.

이사벨라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오가기 시작했다.

한편, 제논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비올라의 방으로 향했다.

‘이불을 덮어드려야겠어요.’

*

비올라가 공작저로 복귀한 지 어느덧 2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마리앙투가는 의외로 조용했다.

당장에라도 결투를 신청할 것 같았는데.’

비올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제발 그냥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으면.’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러기를 바랐다.

한편, 셰일란은 비올라의 방으로 찾아가기 전 호흡을 다스렸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쿵쾅거렸다.

비올라를 만나기 전이면 늘 이렇다.

‘설마, 오늘 또 날 놀라게 하지는 않겠지?

비올라를 볼 때마다 놀란다.

그녀의 성장은 눈이 부시다 못해 찬란할 정도였다.

천재는 아니어도 천재에 제법 근접했다 생각한 제 자신이 초라해지고 부끄러워졌다.

“오늘도 정진하셔야 할 겁니다. 성취가 느린 편은 아니지만 초검은 익히기에 매우 까다로운 검이니까요.”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을 하도 많이 들었더니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내가 많이 부족한가?’

성취가 느린 편이 아니라고 늘 강조해서 말하는 것이, 마치 위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작품 속에서도 ‘초검이 사실은 위대한 검이었다.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는 서술만 있었을 뿐, 어느 정도를 익혔을 때 어느 정도의 실력이 나오는지에 대한 설명 같은 건 없었다.

“오늘은 절삭력을 조금 더 높이는 훈련을 해볼 겁니다.”

풀들을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다.

이제는 실질적인 살상력을 갖춰야 했다.

“이 두꺼운 나뭇가지를 잘라보겠습니다.”

셰일란이 시범을 보여주었다.

꽤 두툼한 나뭇가지가 여러 조각으로 잘려나갔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셰일란은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성공하지 말아라.

이건 내가 10년 차에 겨우 성공한 거란 말입니다.

“알겠어. 해볼게.”

비올라가 정신을 집중하고 셰일란이 가르쳐 준 구결을 옮자 풀들이 나뭇가지들을 잘라냈다.

셰일란은 17조각으로 잘라냈고, 비올라는 3조각으로 잘라냈다.

‘역시 셰일란 정도는 안 되는구나.’

비올라는 크게 실망하지도 않았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셰일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치고 이 정도면 꽤 잘하는 겁니다.”

“위로해 줘서 고마워.”

셰일란은 순간 고개를 갸웃할 뻔했다.

위로?

내가 언제?

‘위로는 내가 받아야 합니다!’

지난 10년의 세월이 너무 무가치하게 변하는 중이었다.

솔직한 말로 셰일란은 울고 싶었다.

셰일란은 오래전, 스승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초검(草劍)이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무려 1,000년 전이라고 했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셰일란은 초검을 만들어낸 초대 종주인 ‘페르서’에 관한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했었다.

‘우와. 초검이 정말 그렇게 대단했어요?’

‘그럼. 세상의 모든 무인이 페르서 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했었지. 어느 날 페르서께서는 초검을 구상하셨단다. 그리고 ‘운’의 경지에 불과 하루만에 이르렀지.

‘운’이라 함은 의지로 풀들을 움직이는 수준을 말했다.

그리고 겨우 2주 만에 ‘절’의 묘리를 갖추셨어.’

‘절’이라 함은 풀들에 절삭력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분은 반인반신이셨다.

‘우와아!’

어렸던 셰일란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셰일란의 깜찍한 반응을 보며 그의 스승이 씨익 웃으며 말했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또 있다면, 그리고 초검을 익힌다면, 그는 대륙최강의 무인이 될 것이다. 아니, 역사 속 최강의 무인이 될 게야.

지금 생각해 보면 스승은 반쯤 미치광이였고 허풍쟁이였다.

그러나 그 허풍이 마냥 거짓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허풍이 진짜였을 줄이야.’

페르서 정도의 성장세를 보이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 줄이야.

셰일란은 스승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유언을 떠올렸다.

‘페르서께서는 말씀하셨다. 구결없이 초검을 사용할 수 있는 이가 초검을 완성시킬 것이라고.’

그때, 비올라가 말했다.

“스승님. 근데 구결 없이도 ‘운’은 가능한 거야?”

기본적으로 ‘초검’에는 구결이 필요하다.

마법으로 치자면 마법 영창이었다.

물론, 쉽고 간단한 하위 마법이라면 영창 없이도 발현이 가능했다.

초검도 그와 비슷했다.

그래서 셰일란은 시범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운’은 초검의 가장 기초적인 운용이다.

셰일란도 구결 없이 ‘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아. 이렇게 하는 거구나.”

비올라가 구결 없이 의지만으로 ‘운’을 선보였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셰일란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셰일란이야 초검에 워낙 익숙하니 운 정도야 구결 없이 가능했지만, 비올라는 경우가 달랐다.

셰일란의 경지가 아니면서 구결 없이 운을 사용해 버렸다.

‘도대체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잠시 할 말을 생각하던 셰일란이 겨우 입을 뗐다.

“……맞긴 합니다. 그러나 기본에 충실하세요. 초검은 구결에 의하여 운용되고, 구결이 기본입니다.”

덕분에 비올라는 자신의 성장세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

비올라는 툰드라를 연무장으로 불렀다.

“대련을 해볼 거야. 최선을 다하도록 해.”

툰드라는 비올라의 풀들을 굉장히 쉽게 피해냈고, 또 간단하게 잘라냈다.

툰드라의 목검이 비올라의 목에 닿았다.

대련에 임할 때 툰드라는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주인인 비올라가 좋아하는 방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련이 끝난 뒤에는 또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송…… 해요.”

대련할 때 최선을 다하는 건 맞지만, 감히 자신이 주인의 목에 목검을 들이대다니.

최선을 다하는 것과 목검을 들이댄 것은 독립적인 문제였다.

“아니. 괜찮아.”

비올라는 툰드라와 대련을 해보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역시 2주로는 턱도 없네.”

아무리 초검이 작가가 선택한 매우 훌륭한 검술이라지만 2주로는 어림도 없었다.

비올라는 겸손하고 겸허하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비첸에게 대련하자고 하면 위험하겠지…?’

비첸은 너무 위험한 살인귀 꿈나무다.

그래서 제논과 대련해 보았는데, 제논과의 대련도 역시 너무 싱겁게 끝났다.

“열심히 노력하시는 모습이 아름다 우시네요.”

“어차피 약한데, 뭐.”

“겸손하시네요.”

제논은 비올라의 어마어마한 성장세를 진작에 알아차렸다.

‘피나는 노력 없이 이 정도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보는 곳에서, 보지 않는 곳에서, 비올라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비올라가 실제로 본인이 약하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또다시 2주가 흘렀다.

물망초 연회가 끝나고서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올라의 앞으로 서신이 하나 도착했다.

‘결투장?’

마리앙투로부터 온 결투 신청서였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올 게 왔구나.’

초검으로는 어차피 어림도 없을 테고, 아무래도 퐁퐁이를 소환하여 몸을 보호해야 할 것 같았다.

검제의 검으로부터 마녀 하이디를 지켜주었던 퐁퐁이다.

방어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가졌으니 몸 보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가 누구지?’

결투 신청서를 열어보았을 때, 비올라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엥?’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