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1


지나치게 좋은 양자인 역할을 해버렸다. 111화 제르미는 양손 가득 사과를 사왔다.

유모는 예전부터 사과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제르미는 어디를 갔다 올 때마다 꼭 사과를 사왔다.

“유모 거야.”

“고맙습니다.”

“무거우니까 내가 유모 방까지 들어다 줄게.”

“아유, 아니에요. 제가 들게요. 공자님 먼 길 다녀오셨는데 푹 쉬세요.”

제르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문득 느꼈다.

유모의 얼굴과 손에 주름이 더 많아졌다.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지만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

“유모, 그런데 나 고민이 있어.”

“고민이요?”

제르미와 유모는 유모의 방으로 들어왔다.

“유모가 가르쳐 줬잖아. 세상에는 제2, 제3의 므엘란이 많다고.”

“그랬지요.”

“그런 슬픈 사람들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좋은 생각이셔요.”

제르미는 물망초 연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얘기했다.

“나는 그냥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는데, 비올라는 나를 정말 싫어하는 걸까?”

싫어하는데 억지로 다가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리라.

만약 비올라가 싫다면, 억지로 다가갈 생각은 없었다.

다만 비올라와 제대로 얘기는 한번 해보고 싶었다.

툰드라를 내보낸 것이 비올라의 의사 표현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유모가 빙그레 웃었다.

“소문에 의하면 비올라 공녀님은 비겁하지 않으신 분이시던데요.”

“비겁하지 않지.”

“만약 싫어하셨다면 직접 말씀하셨을 거예요.”

“그렇지?”

제르미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공자님의 접근 방식은 배려가 결여되어 있어요.”

제르미는 유모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배우고 싶었다.

“왜? 어떤 부분이? 잘 모르겠어.”

“우리 공자님에게 팬덤이 있다는 건 아시나요?”

“팬덤? 그게 뭔데?”

유모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하여 비올라 공녀님은 우리 공자님과 얽히고 싶지 않을 거예요.

특히 사교계 데뷔 전후로는요.”

제르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부담스럽게 한 거야?”

“아마도요.”

유모는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제르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 관계는 보통의 유모와 공자의 관계라고 볼 수 없었다.

보통 다른 유력 가문에서 유모가 이런 식으로 훈계하고 가르치면 큰일 난다.

어떤 공자들은 감히 나를 가르치냐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공자님은 다르시지요.

제르미는 정말로 배우고 싶어 했고, 가르침을 달게 받았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마 제르미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유모 말씀 듣고 보니 이제 알 거 같아. 내가 비올라에게 다가갔던 방식은 배려 없는 수준이 아니라.”

제르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

사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친구가 되고 싶어 적극적으로 다가갔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인정해야 했다.

“유모, 나는 내가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기 싫다? 솔직히 몰랐다고 말하고 싶어.”

“그렇지만 인정하시지요?”

“응. 몰랐다는 말처럼 무책임한 말은 없다고 생각해. 난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한 번 더 입술을 깨물었다.

“더 빨리 깨우쳤어야 했는데.”

비올라에게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비올라에게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

여태까지는 욕심이 너무 앞섰다.

그래서 다른 것들을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았다.

실수였고, 잘못이었다.

“우리 공자님이라면 좋은 친구가 되어주실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뭘요. 사실을 말한 것뿐인걸요.”

제르미는 다짐했다.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비올라가 말했다.

“우리. 거래를 해볼까? 물론 선택은 둘 중 하나야. 불개미의 먹이가 되어 초라한 삶을 마감하게 될지, 내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지.”

그 모습은 마치 툰드라와의 첫 만남에서, 툰드라의 입속에 단도를 밀어 넣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진일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에는 단도를 사용하여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였으나 지금은 그런 무기 없이도 분위기만으로도 그때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논은 굉장히 뿌듯해했다.

‘성장하셨군요, 공녀님.

셰일란은 말을 더듬었다.

“저, 저, 저, 그, 그게……….”

“3초 줄게.”

비올라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삼.”

“저… 그.”

“이.”

“그, 그러니……….”

“일.”

“제,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비올라가 빙그레 웃었다.

“무슨 제안인지 안 들어봐도 괜찮지?”

“무, 물론이죠!”

안 괜찮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불안감에 셰일란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무슨 제안이 됐든 불개미들의 먹이가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원대한 꿈을 가지고 청해를 넘어왔는데 여기서 개죽음당할 수는 없었다.

“말이 잘 통해서 좋네.”

“제가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그리하여 제안과 협상이 진행되었다.

사실 이쯤 되면 제안과 협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비올라는 제안과 협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하여 네 검술을 내게 가르쳐주면 좋겠어.”

헤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올라가 왜 벨라투 검식을 놔두고 굳이 동대륙의 검술을 익히려는 건지도 이해했다.

‘비올라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검술을 익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지.’

헤라는 비올라가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하얀 벨라투로서의 공부’에 투자한다고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의 비올라는 없었을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어.’

벨라투 검식을 익혀서는 다른 ‘검은 벨라투’를 이길 수 없다.

비올라는 지금 전략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벨라투 검식을 익혀서 형제들에게 패배하느니, 다른 검술을 익혀서 보조로만 사용하겠다는 뜻이겠네.’

‘하얀 벨라투’로서의 더 높은 성장을 위해 벨라투 검식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헤라는 그것이 하얀 벨라투로서 굉장히 좋은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비올라에게는 ‘진짜 칼로 찌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말이다.

헤라가 물었다.

“언제 돌아올 거야?”

“글쎄. 기본만 배우고 돌아갈 거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물망초 연회에 관해서는 언니가 보고 올려줘.”

“그래.”

“고마워.”

“나도 네가 새로운 걸 배우는 걸 보고 싶었는데, 언니한테도 비밀로 할 줄은 몰랐어.”

헤라는 서운한 듯 말했지만 실제로 서운하지 않았다.

동생이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아군에게도 숨기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도 너무 늦지는 마. 마리앙투에서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해 올 거야.”

“알겠어.”

비올라는 마치 그 결투가 기대된다.

는 듯 씨익 웃었다.

치마 밑의 다리는 덜덜 떨렸지만 말이다.

헤라와 에르사는 먼저 길을 떠났고, 비올라와 제논, 그리고 툰드라가 자리에 남았다.

비올라는 셰일란의 초검(草劍)을 익히기로 하였다.

“그게…… 초검을 익히려면 먼저 구결이라는 것을 외워야 합니다. 그것이 기본입니다.”

“좋네.”

“예?”

비올라가 가볍게 웃었다.

“사실 멋있었거든.”

“…..02?”

“풀피리 소리도 멋있었고, 풀들이 휘날리는 것도 멋있었어.”

사실 멋있지는 않았다.

꽤 촌스러운 등장이었다.

그렇지만 셰일란은 그 말에 반쯤 감동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 같았다.

“지, 진짜입니까?”

초검은 동대륙에서도 꽤 우스꽝스러운 검술에 속했다.

진짜 검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늘 구결을 읊으며 싸워야 하는 다소 구시대적이고 촌스러운 검술이었으니까.

그러나 셰일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초검은 멋진 검술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그는 속마음을 고백했다.

“멋짐을 폭발시키려고 풀피리를 불었는데…….”

동대륙에서는 누구도 멋있다고 해준 적이 없었다.

셰일란의 가슴속에 웅장함이 깃들었다.

“아무래도 저는 중앙대륙에서 먹히는 스타일이었나 보네요.”

“나는 네가 네 검술에 자부심이 있다는 걸 느꼈어.”

“물론입니다!”

어느새 셰일란은 두려움을 잊었다.

그의 눈동자에 초검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차올랐다.

“내가 만약 너였다면, 초검을 세상 방방곡곡에 알리고 싶었을 것 같아.”

셰일란의 눈이 커졌다.

사실 그가 중앙대륙으로 넘어온 것이 바로 저 이유였다.

암살자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면 제자들이 알아서 줄을 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올라의 공감에 셰일란은 크게 감격했다.

“맞습니다. 초검은 차세대 유행을 이끌게 될 세련된 검술이니까요.”

아냐.

그거 아니야.

초검은 네 대에서 끝나.

너는 개그캐가 될 운명이고, 개그캐에게 검술을 배우려는 무인 지망생들은 없단 말이야.

비올라는 그 슬픈 말은 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초검(草劍)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아까운 검술입니다. 개그캐 셰일란이 사용해서 그렇지, 원래는 벨라투 검식 이상의 효용을 가지는 최강급 검술로 설정했었어요.]

[만약 ‘초검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났다면 아마 벨라투 검식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 뛰어난 검술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올라는 작가의 설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 나를 제자로 받아주겠어?”

“제, 제자로요?”

셰일란은 이 급전개가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영 못 받아들일 것도 아닌 듯했다.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런데 말이 이어졌다.

“숙식 제공. 주 3회 사사. 월급 800만 달리아.”

셰일란의 눈이 커졌다.

하마터면 절할 뻔했다.

숙식 제공에 주 3회 가르침에 월급 800만 달리아라니.

셰일란이 넙죽 엎드렸다.

“스승으로 모시겠, 아, 아니, 제가 스승이죠. 잘 부탁드립니다. 제자님.”

“나도 잘 부탁해, 스승.”

기형적인 관계가 만들어졌다.

비올라는 아무것도 아닌 얘기를 하듯 툭 던졌다.

“아참.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

“그렇죠, 뭐.”

개그캐 셰일란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스승한테 의뢰한 세나 공녀는 좀 덜떨어지는 스타일인데, 마리앙투 공작은 좀 달라. 아마 비밀리에 널 죽이려 들걸?”

“저, 저를요?”

“응. 세나 공녀가 만들어낸 치부잖아. 암살 의뢰를 했고, 대상이 아주 잘 살아 있는데, 심지어 그 대상이랑 같이 있네? 마리앙투 공작 입장에서 어떻겠어? 당연히 널 죽여야겠지?”

셰일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작중 최고의 겁쟁이가 겁을 먹었다.

“걱정 마. 벨라투가는 안전할 테니.”

그러니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은 못 칠 거야.

잠자코 초검을 내게 바치도록 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나 왠지, 사악해진 거 같아.’

기쁜 듯 슬픈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예정에 없던 초검 수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간단하게 구결 정도만 익히고 초검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파악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했다.

녹음이 무성한 이곳이, 겨울성보다는 초검을 익히기에 더 좋았으니까.

셰일란도 그러려고 했다.

‘음? 엥? 뭐야? 응?’

셰일란은 믿기 어려운 듯 눈을 세차게 비볐다.

비올라의 손짓에 따라 풀들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