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11화제논을 내보내고 난 뒤, 비올라는 소파에 앉았다.

툰드라는 쓰러져서 색색-작은 숨을 내뱉고 있었다.

모양새만 보면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소설 속 설정을 잘 이용해야 해.’

툰드라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지배자로서의 모습에 큰 호감을 느낀다.

툰드라는 원작 속 비올라의 지배자로서의 모습에 반하게 된다.

그러나 늘 가슴 한편에 결핍을 느낀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던 툰드라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애정 결핍상태였다.

비올라에게 따스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갈구한다.

그러나 원작 속 비올라에게 그런 모습은 없었다.

훗날 툰드라는 결국 비올라에게 찔려 죽는다.

소설은 그 누구에게도 아름답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린은 이 소설이 조금 더 아름다운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툰드라가 작게 말했다.

“……0F?”

“뭐라고?”

“……이냐고.”

“뭐라는 거야?”

“진심…… 이냐고.”

안 괜찮을 거야.

그렇지만 내가 옆에 있어줄게.

그 말이.

진심이냐고 묻고 싶었다.

비올라가 대답하기 전에 툰드라는 기절해 버렸다.

세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툰드라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나는 이제 뭘 하면 돼?”

너는 그냥 몸 건강히 커서 내 편들어주면 돼.

너는 그냥 존재 자체가 내게 큰 힘이 되어줄 거야.

나중에 힉슨 경만 소개해 주면 알아서 소드 마스터가 되어주겠지.

툰드라는 혼자서 결론을 내렸다.

“대외적으로 충성스러운 개가 필요하다고 했지?”

“맞아.”

“나는 너를 주인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그래. 그게 낫겠지.”

툰드라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 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 개가 될게, 주인님.”

개라고 했다.

마음의 각오를 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저런 말을 듣는 게 영 거북하고 불편했다.

‘여긴 판타지 세계잖아.’

벨라투의 그림자) 세계관 속에서 저 정도는 애교였다.

한편, 툰드라는 상황 적응이 굉장히 빨랐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표정과 말투로 말을 이었다.

“짖으라면 짖고, 배를 까라면 까고, 네 발을 핥으라면 핥을게. 네 개가 되어서.”

아니, 잠깐만.

내가 그렇게까지 얘기한 적은 없잖아?

발을 왜 핥아, 더럽게!

“그러니까 약속 지켜.”

“무슨 약속.”

“안 괜찮지만, 옆에 있을 거란 약속.”

비올라는 툰드라를 힐끗 쳐다봤다.

오래 보지는 못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엉망진창이 된 강한준을 보는 것 같아서 오래 보지 못했다.

“약속…… 꼭 지켜.”

툰드라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누가 되었든 좋으니 그냥 옆에 누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는 저 마음.

비올라도 잘 알고 있었다.

비올라가 간신히 대답했다.

“존대. 확실히 해. 습관이 중요하니까.”

툰드라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남주다운 통찰력을 발휘하여 남주답게 대답했다.

“네. 주인님의 개가 되어, 벨라투를 집어삼키는 데 도움이 되어볼게요.”

“……내일. 네 아버지한테 가자.”

제논에게 국화꽃 한 송이를 준비하라 일렀다.

*

엉망이 된 오두막 앞.

툰드라가 나무 방망이를 휘두르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꺼져, 이 개새X들아!”

언제 알고 찾아왔는지, 대머리독수리가 툰드라 아버지의 시체를 파먹고 있었다.

툰드라는 아버지의 시체를 붙들고 한참을 울었다.

“내 옆에 있어 준다며! 엄마는 날버려도, 아빠는 날 안 버린다고 약속했잖아!”

한참 동안 울었다.

비올라는 딱히 위로하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

지금은 그 어떤 위로도 닿지 않을 거다.

강한준이 그렇게 해줬었다.

입에 발린 위로 대신, 그냥 옆에 있어 주었다.

어린 아린에게 그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비올라가 툰드라에게 다가갔다.

그냥 옆에 있어주었다.

툰드라는 무릎 꿇은 채 한참이나 오열하다가 비올라를 올려다봤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보니, 비올라는 가슴이 아파 시선을 피했다.

“주인님.”

“왜?”

“안아주시면 안 돼요?”

비올라의 몸이 움찔했다.

‘그런 얼굴을 하고서.’

강한준의 얼굴을 하고서.

강한준의 몸을 하고서.

그렇게 애처롭게 말하지 말란 말이야.

‘넌 오빠가 아니잖아.’

그렇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툰드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짝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여 주었다.

열두 살의 툰드라가 일곱 살의 비올라보다 훨씬 컸다.

비올라는 어린 아린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근.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

그런데 이성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또 의식이 흐릿해졌다.

아무래도 툰드라의 눈을 오래 쳐다보거나, 스킨십을 하게 되면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 같았다.

‘ ‘어지…… 러…… 워.’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제논은 발견했다.

‘또 진짜 모습!’

비올라의 눈이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제논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설렜다.

‘지금이라면 장난감의 뒷목을 언제라도 찔러 죽이실 수 있겠어요.

비올라가 실전 연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에 어린 살기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붉은 눈을 한 비올라와 제논의 눈이 마주쳤다.

비올라가 싱긋 웃었다.

장난감을 발견한, 피에 미친 살인 귀의 오묘한 웃음이었다.

비올라의 눈에는 짙은 살기와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 찌르면 잘 찌를까, 어떻게 죽이면 잘 죽일 수 있을까, 그것을 즐겁게 고민하는 눈동자 같기도 했다.

‘정말 벨라투스러우시네요.’

지극히 벨라투스러우면서, 또 가끔은 벨라투스럽지 않다.

‘입양 딸이면, 달라야 하겠지요. 순혈이 아니니까.’

비올라 공녀의 행보가 기대되었다.

저토록 자연스레 가면을 바꿔 쓰는 모습이 신기했다.

저 나이에, 저런 가면과 저런 처세술이라니.

툰드라는 제 손으로 직접 땅을 팠다.

손에서 피가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를 깊은 땅에 뉘었다.

다시는 산짐승이 파먹지 못하도록 깊게 파묻었다.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툰드라가 고개를 떨구었다.

“아빠.”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동안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어.”

가난한 아버지였지만, 툰드라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

“걱정 마. 이제 다른 사람이 옆에 있어준대. 공녀님이래.”

비올라가 국화꽃을 내밀었다.

툰드라가 그 국화꽃을 받았다.

씩씩하게 눈물을 닦고 아버지의 무덤 앞에 국화꽃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나 이제 갈게. 그동안 고생했어.

이제는 고생하지 마. 하늘에서 편히 쉬어.”

*

비올라와 툰드라는 방으로 돌아왔다.

“제논.”

제논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공녀님?”

“이 개. 마음에 안 들어.”

손가락으로 툰드라를 가리켰다.

툰드라의 몸이 움찔했다.

“그럼 이제 죽일까요?”

“방을 내주고 따뜻한 음식을 먹여.”

툰드라의 상태가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곳이 지구보다 풍족하지 못한 세계관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말이다.

아마 툰드라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컸을 거다.

가난한 사냥꾼의 자식이었으니까.

“네?”

“내가 키우는 개가, 이렇게 아있으면, 내 품위가 떨어지잖아.”

비올라가 가볍게 웃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우아함과 기품이 깃들어 있었다.

제논이 보기에는 그랬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름다워야 하니까. 비록 그것이 장난감일지라도.”

그니까 맛있는 거 많이 먹고 기운차려.

한준 오빠 얼굴로 죽상 하고 있으면 나부터 짜증 나니까.

기분이 묘했다.

이런 건 원래 오다 주웠어, 먹든지 말든지, 하는 서브 남주들의 대사아닌가.

츤데레가 된 건가.

“제논, 이해했어?”

“네, 좋은 말이네요.”

제논은 납득했다. 인상적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말.

그것이 비록 장난감일지라도.

너무나 벨라투다웠다.

허리를 깊이 숙였다.

“명, 받듭니다, 비올라, 벨라투, 공녀님.”

‘벨라투’에 묘한 강조가 들어간 것 같았지만 비올라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흘렀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됐네.”

비첸이 얻어맞고 쓰러져 신음하고 있을 거다.

툰드라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비첸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갈 길이 구만리였다.

비첸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비올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비첸을 발밑에 두고서.

‘불타는 것 같은 붉은 머리. 살모사 같은 눈빛.’

창백하기 짝이 없는 피부.

쥐를 잡아먹기라도 한 것 같은 새빨간 입술.

어딘가 마녀 같은 오묘한 분위기.

그러면서도 묘하게 아름다운 여자.

비올라는 저 여자가 누구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

이 집안의 실세.

헤론 공작 다음의 권력과 위세를 가지고 있는 공작 부인이었다.

아버지인 헤론과는 정치적 혼인 관계.

둘 사이에 사랑은 없으나, 서로가 서로에게 충실하는 관계다.

“그대가 비올라 공녀군요.”

“안녕하세요, 이사벨라 공작 부인.”

“한번에 저를 알아보다니. 공부 열심히 했나 보네요.”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거대한 독사 한 마리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역시 이곳은 판타지 세계가 맞았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기절시킬 수 있는 곳. 살기와 마나와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

‘절대 기세에서 밀리면 안 돼.’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이곳에서 한 번 얕잡아 보이면 끝이다.

“네, 벨라투 공작가는 살벌한 야생이더라고요.”

“이해도가 높네요.”

이사벨라 공작 부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빈민가 출신이라 그런가. 눈치도 빠른 것 같고.”

땅에 쓰러진 비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아들은 착하긴 한데, 독기가 없어요.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온 실 속 화초처럼 컸기 때문이겠죠.”

“빈민가 출신. 혈통도 알 수 없는 천민 출신 주제에 고귀한 아드님과 어울리지 말라…… 라는 말을 고상하게 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