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8
툰드라의 특별한 변화가 생긴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108화.
비올라와 오랜만에 보니, 대략 15분 정도 지났고 저도 모르게 마나 꼬리가 생성되어 흔들렸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신체 변화였고, 비올라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수록 꼬리의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다.
‘주인님의 냄새.’
방 안에서 비올라의 냄새가 느껴졌다.
그때부터 이미 꼬리가 생성되었고, 문을 열어 비올라의 얼굴을 본 순간 꼬리가 맹렬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지?”
세차게 흔들리던 꼬리가 우뚝 멈췄다.
“네?”
“제르미랑은 왜 다툰 거야?”
외부인을 잘 쫓아냈다고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툰드라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제르미가 자꾸 주인님을 보고 싶다고 억지를 부려서 막았어요.”
꼬리가 축 늘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비에 쫄딱 젖은 아기 강아지 같았다.
‘야. 그 모습은 반칙이잖아.’
사실 비올라는 잘생긴 것보다는 귀여운 것에 약했다.
강아지, 고양이, 어린이, 기타 등등.
강아지에도 약했고 아기에도 약한데, 심지어 아기 강아지 같은 모습이라니.
“허튼짓하지 마.”
툰드라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튼짓’이란 말인가.
“함부로 결투 따위 하지 말란 뜻이야. 알아들어?”
아하! 그 말이구나!
“네, 알겠어요.”
결투는 안 되지만 사냥은 된다.
산적을 사냥한 것처럼 말이다.
‘결투 말고 사냥. 그래, 사냥을 하자.’
툰드라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마음 자체는 예뻤어.”
결과적으로 툰드라의 행동은 일을 너무 크게 키워버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툰드라의 진심은 알 것 같았다.
툰드라는 본능적으로 비올라가 제르미를 멀리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제르미와의 결투도 마다치 않은 거지.’
이 세상 그 누가 있어 이토록 자신을 생각해 준단 말인가..
저 마음 자체는 고마웠다.
비올라가 툰드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툰드라는 허리를 숙여 비올라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선하고 착한 눈동자에 비올라의 모습을 하염없이 담았다.
오늘도 3초 정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꼭 허락을 받도록 해.”
“네.”
비올라가 툰드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툰드라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풍만함을 느꼈다.
비올라가 문을 열고 나간 뒤에도, 툰드라는 한참이나 비올라의 손길이 닿았던 제 머리를 만졌다.
*
비올라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논이 툰드라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비올라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비올라 앞에서의 착하고 순한 눈망울은 비올라가 없을 때는 날카롭게 변했다.
“어제는 어디를 다녀오셨나요?”
“사냥을 좀 다녀왔어.”
“무슨 사냥이었죠?”
“산적들을 사냥했어.”
“왜요?”
“주인님 가시는 길에 방해될까봐.”
제논은 툰드라의 눈빛에 일렁이는 광기를 읽어냈다.
“공녀님께 방해되는 모든 것을 죽이겠다… 는 것처럼 들리네요.”
“죽이지는 않았어.”
“안 죽였나요?”
제논은 문득 이유가 궁금해졌다.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죽이는 것이 가장 좋은데.
“안 죽였어.”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툰드라가 제논을 쳐다보았다.
‘오늘도 냄새가 바뀌었네.’
매일 냄새가 바뀌어서 의뭉스런 녀석.
지금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죽이면 냄새나잖아.”
제논이 고개를 갸웃했다.
“냄새요?”
“시체 특유의 냄새.”
“….…아.”
제논이 빙긔 웃었다.
“그러니까, 비올라 공녀님께서 가시는 길에 불쾌한 냄새가 나면 안되니까, 그래서 안 죽인 건가요?”
“응. 주인님의 길에는 꽃향기만 가득하면 좋겠거든.”
“그래서 안 죽였다라.”
사실 산적 토벌은 전원 사살이 원칙이었다.
산채의 모든 사람을 죽여야 했다.
“원칙은 알고 계시지요?”
“알아. 모두 죽여야 하는 거.”
괜한 인정을 베풀어 살려두었다가는 후환이 될 수도 있다.
비정하지만 그것이 냉정한 현실이었다.
“본래는 책임을 따져 물으려고 했습니다.”
“책임?”
“어설픈 일을 벌이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논은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북북 찢었다.
벨라투 본가에 올리는 보고서였다.
“그러나 이유가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므로 본 보고서는 폐기하겠습니다.”
제논이 밖으로 나간 뒤 툰드라는 침대에 누웠다.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일지도.
제논 녀석은 비올라를 상당히 위하는 것 같았다.
툰드라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비올라 일행은 하이릴스 후작령을 떠나 벨라투가로 방향을 잡았다.
*
고도의 상승 마법이 적용되어 마차 안은 늘 편안했다.
탑승자가 원하지 않는 모든 소음을 걸러주었고 마치 침대처럼 안락했다.
헤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무슨 내기?”
“우리가 습격을 당하는지, 당하지 않는지.”
비올라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하기야.
이 세계가 치안이 아주 좋은 세계는 아니지.
습격은 무슨 습격!
그런 건 없을 거야!
…와 같은 희망 섞인 얘기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비올라는 솔직히 말했다.
“한두 번은 습격이 있을 것 같아.”
“난 세 번 볼게.”
헤라는 재미있다는 듯 킥킥대며 말을 이었다.
“한 번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들.”
벨라투가의 표식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머저리들이 있을 것이고,
“다른 두 번은 우리가 벨라투임을 알면서도 습격하는 배포 좋은 놈들.
개중 한 번은 배포만 좋고 실력은 뒤떨어질 테고, 또 한 번은 배짱도 좋고 실력까지 좋겠지.”
비올라는 헤라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사실 세 번도 적게 잡았다.
이 세계는 그리 안전한 세계가 아니다.
그래서 어디를 갈 때면 꼭 호위기사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닌다.
유력 가문의 어느 자제가 움직일 때면 마차가 최소 5대 이상, 기사가수십은 따라붙는다.
이렇게 소규모로 이동하는 가문은 벨라투가 거의 유일했고, 벨라투체 럼 적이 많은 유력 가문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근데 이상하게 머저리들이 안 보이네.”
보통 이쯤 되면 산적의 습격이 있게 마련인데 지나치리만큼 고요했다.
마치 누가 미리 청소라도 한 것처럼.
시간이 좀 더 흐르자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졸려.’
아주 어릴 때보다는 덜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잠에 취약했다.
꾸벅꾸벅 졸았다.
꿈을 꾸었다.
화살이 마구 날아다니는 괴이한 꿈이었다.
꿈속에서 비올라는 날렵하게 움직이며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냈다.
화살을 피해 낼 때마다 점수가 올랐다.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히히..
그런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요상한 냄새가 났다.
‘피 냄새?’
순간, 눈을 번쩍 떴다.
‘헉!’
비올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범벅이 된 툰드라가 보였다.
툰드라는 검을 갈무리하고서 비올라 쪽을 향해 걸어왔다.
“주인님까지 나서게 해서 죄송해요. 저 혼자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는데.”
비올라는 자신의 손에 들린 단도를 보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 어억! 이, 이게 뭐야?’
꾸벅꾸벅 잠든 사이에 진짜 비올라가 튀어나온 모양이다.
비올라는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바닥에 집어 던질 뻔했다.
‘미친!’
꿈인 줄 알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은 나지 않았으나 온몸의 근육이 찢어질 듯 아팠다.
마차 문이 열리며, 짝! 짝!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헤라였다.
“터져 나오려는 광기를 잘 숨긴다.
했더니. 오늘은 숨기지 않았네.”
헤라는 메마른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실력이 꽤 좋은 자들이었는데 말이야.”
“………..”
비올라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이 끈적한 피의 감각이 싫었다.
“이래서 나는 네가 좋아.”
“씻고 싶어.”
퐁퐁이를 소환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원작 속 퐁퐁이는 ‘피의 정령’ 이었지만 피를 싫어했다.
처음에는 피를 두려워하기도 했다.
하이디에 의해 길들여지고 악마가 되지만 퐁퐁이는 그 운명에 힘들어 했었다.
그런 아이에게 피를 씻겨달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툰드라가 말했다.
“제가 주변에 폭포를 알고 있어요.”
폭포에 도착한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런 폭포가 여기에 있어?’
한국에서 몇 번 봤던 폭포는 폭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꽈아아아-!
저 높은 곳에서 물이 낙하하는데, 그 위용이 어마어마했다.
다행히 저만치 앞에는 물살이 그리 강하지 않은 곳이 보였다.
툰드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참. 여기 식인 물고기가 몇 마리 있는 거 같아요. 이빨이 날카롭고 턱이 꽤 단단해요.”
그러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맛은 없더라고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 아, 음.”
어제 피 씻으러 갔거든요.
그 말을 했다가는 혼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길을 좀 더 편한 길을 미리 알아보고 있다가 발견하고 물을 좀 마셨어요.”
비올라는 제논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식인 물고기가 두려워서 못 씻겠다고 하는 건 이상하지?’
일부러 물에 발을 담갔다.
물이 굉장히 찼다.
다행히 드레스로 가려진 부분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의 차가움마저도 완벽히 막아주었고, 물에 젖지도 않았다.
물에 닿기만 해도 옷에 묻어 있던 핏방울이 쓸려나갔다.
과연 명장의 드레스다웠다.
‘옷 입은 채로 씻을 수 있어서 편하네.”
그렇게 차갑지도 않고,
이 차가운 계곡물이 미온수처럼 느껴졌다.
옷은 저절로 깨끗해졌으니, 몸에 묻은 핏자국만 닦아내면 될 것 같았다.
“나는 목욕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네! 식인 물고기 따위는 절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게요.”
툰드라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비올라가 명령을 내려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으아아아악! 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비올라가 고개를 돌려 보니 남자 두어 명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 그 괴물이다!”
무엇인가에 쫓기듯 뛰어서 산으로 숨어버렸다.
‘뭐지?’
강력한 마물이라도 나타난 건가.
툰드라가 세상 착한 눈망울로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쟤네들 눈에는 무서운 귀신이 보이나 봐요.”
그때까지는 몰랐다.
그 귀신의 정체가 툰드라였을 줄은.
그때 바람이 일었다.
인위적인 바람과 함께 풀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는 한 가지 설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건,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