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9
어리석은 자들의 말로(4)
자신들이 방심한 걸까? 아니면 순진했던 걸까?
그렇다고 단정 짓기에는 오스만의 움직임은 예상외였다.
아르다한까지 점령한 오스만군의 다음 목적지는 삼츠헤의 수도인 아할치헤가 되리라 생각했다.
이 상황을 만든 원흉인 크바르크바레가 있으며, 가장 가까운 도시기도 했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예상 가운데서 숨죽여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왔다.
-오스만군이 진격을 시작했다!
무혈입성한 아르다한에서 도시 안정화에 오랫동안 힘쓰던 오스만군이 움직였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주판을 튕겼다.
아할치헤가 점령되더라도 시간 벌이는 되리라 여겼다.
오스만군은 그 이유가 파괴와 약탈이든, 도시 안정화든 점령한 도시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렀으니까.
지금까지 점령한 그 어떤 도시보다 큰 아할치헤를 소화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낭비할 터였고, 그동안 다른 조지아 왕국과 연계를 하거나 사파비로 도망칠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오스만군은 이런 생각을 조롱하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 왜 오스만군이 이쪽으로 온단 말이야!”
아할치헤에서 하루 남짓한 거리에 떨어진 아스핀자를 다스리는 하위 귀족 아즈나우리인 시몬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아스핀자는 정원과 과수원이 있는 50가구로 이뤄진 큰 마을이지만, 그렇다고 도시는 아니었다.
마을 인구의 수십 배에 달하는 대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에 맨정신을 유지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고, 소식을 전해온 전령도 안색이 나쁜 건 마찬가지였다.
“만 명으로 이뤄진 네 개의 오스만 군대가 사방으로 진격을 시작한 상황입니다. 음타바리께서 일단 소식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빌어먹을 소식만 전하면 끝인 게냐!”
음타바리(mtavari)는 왕자에서 유래된 뜻으로 지금은 삼츠헤, 구리아, 스바네티, 압하지야, 밍그렐리아.
이 다섯 공국의 지배자를 뜻하는 말이었고, 이 소식을 전한 크바르크바레를 떠올리며 시몬은 이를 아득 갈았다.
사실상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한 것과 다르지 않았고, 오스만이 이곳으로 진격하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카르틀리로 진격하려고 하는 게구나!’
아할치헤를 점령하지 않고 카르틀리로 넘어가는 길 중 하나가 이곳 아스핀자에서 이어졌다.
왜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지 이유는 알았지만, 이유를 알았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잠시 떨며 고민하던 시몬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쳐야 한다. 아랫것들이 눈치채기 전에 도망쳐야 해.”
50가구가 적게 보일지 모르지만, 마을치고는 큰 편이었고, 수도와 가깝기에 소식에도 밝은 편이었다.
오스만군이 다가오고 있고, 자신이 도망치려 한다면 요즘 분위기로 봐선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가족들과 귀중품을 챙겨 도망치려던 시몬의 귓가로 성난 목소리가 들려온 게 그때였다.
-저항하는 놈들은 전부 죽여라!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달리 낯선 언어였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기에 지금 상황을 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오스만군이 벌써 도착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야 시몬은 고작 마을을 점령하는 데는 본대가 올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흉악한 시파히들 앞에 시몬은 무릎을 꿇었다.
“하, 항복이오! 목숨만은 살려주시오!”
삼츠헤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풍경이었다.
*
지금까지 느긋하게 움직였던 것은 거짓말이라도 된다는 듯이 오스만군은 태풍처럼 몰아쳤다.
4개의 군대로 분할된 병력은 2, 300명 정도의 정찰대들을 운영하며 마을들을 빠르게 점령했고, 도시나 요새를 마주하면 무리하게 점령하지 않았다.
우선 으레 하는 공성전 절차처럼 우선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을 보냈다.
“우리는 항복할 생각이 없소! 당장 돌아가시오!”
아르다한의 소식을 접한 병사와 백성은 항복하고 목숨을 부지하길 바라였으나, 결정을 내리는 귀족들은 쉽게 항복할 수 없었다.
도시나 요새를 지키는 귀족쯤 되면 오스만 배신에 한 손 거들었거나, 알고도 묵과한 이들이 태반이었다.
항복하더라도 귀족의 씨를 말려버릴 것처럼 움직이는 오스만이 자신들을 살려둘 리가 없었다.
귀족의 대답에 사신은 담백하게 답했다.
“알겠소.”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후회하게 될 거라는 으름장도 놓지 않았다.
그저 짧게 답하고 몸을 돌려 그대로 돌아가자, 오히려 어안이 벙벙한 건 귀족들이었다.
상식과 어긋난 행동에 귀족들이 불안함을 느끼거나 말거나, 사신은 돌아갔고, 잠시 후 오스만군이 움직였다.
-콰앙!
항복을 거절했다는 소식과 함께 곧 있을 전투에 긴장하고 있던 병사들은 굉음에 심장이 덜컹하는 기분이었다.
조지아 전역에 떠도는 온갖 흉흉한 소식 중에는 아르트빈과 샤브샤트를 박살 낸 대포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고, 소리만 들어도 저 무기가 소문의 주역임을 알 수 있었다.
성벽이 후두둑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병사들은 두려움보단 이상함을 느꼈다.
“저, 적이 물러납니다!”
“나도 보고 있다.”
발사된 대포는 한 문이었고, 성벽에 흠집만 만든 오스만군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려운 적이 알아서 지나간다는 건 기쁜 소식일지 모르지만, 지금처럼 이유를 알 수 없다면 기쁨보단 찝찝함이 남을 뿐이다.
선뜻 기쁨의 함성조차 지르지 못할 때, 한 병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이러면 우린 오스만과 싸운 겁니까?”
일방적으로 맞았고, 양측 다 별다른 피해가 없으니 싸웠다고 보기도 민망했다.
하나, 관점에 따라 공성전을 벌였다고 볼 수 있었고, 그리 생각하자 온몸이 싸늘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관례로 공성전이 일단 벌어지면 방어측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권리를 잃어버린다고 여겼다.
방금 대포 한 방이 이곳을 살생부에 올리는 행위라는 걸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신이시여.”
병사는 떨리는 손으로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움켜쥐었다.
네 개로 찢긴 오스만 군대의 진격조차 막지 못하고 있는 게 현재 조지아의 상황이다.
조지아를 점령하는 게 중소도시나 요새를 지금 당장 무리하게 점령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말라 죽을 테니까.
그때 오늘의 빚을 청산하겠다는 오스만의 행동은 극심한 공포를 안겨줬고, 오스만군이 지나간 도시에는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바, 반란이다! 반란이 일어났다!”
그 후 요새와 도시할 것 없이 반란이 일어나는 건 썩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조지아는 빠르게 말라 죽었다.
*
네 개로 나뉜 군대는 삼츠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카르틀리 왕국, 이메리티 왕국, 구리아 공국으로 진격했다.
삼츠헤를 마무리 짓지도 않고 올지 몰랐던 세 나라는 속수무책으로 땅이 점령되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런 저항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카르틀리 왕국의 왕 다비드 10세가 이끄는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라.”
다시 뭉치기 전에 각개격파를 할 기회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아르다한에서 유수프를 지키고 있는 일만의 병력을 제외해도 사만의 병력이 조지아를 들쑤시고 있다.
조지아가 다시 하나로 뭉쳐도 이겨낼 수 없는 병력 차이였고, 전력 약화를 시킬 기회라고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함께 보고를 받은 솀시는 조소를 지었다.
“고작 카르틀리 따위가 제국과 맞붙으려 하다니 멍청한 생각이었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용기는 만용에 불과할 뿐이지.”
대패를 한 다비드 10세는 만용을 부린 꼴이었다.
기병과 포병으로 이뤄진 오스만군을 상대한 카르틀리는 엄청난 피해를 봤다.
만오천의 병력 중 5천이 사망했고, 많은 병력이 패배로 인해 탈영했으니까.
수도인 트빌리시로 돌아간 병력이 오천이 안 됐고, 왕의 동생인 조지와 바그라트가 목숨을 잃었다.
‘동생들을 숙청할 생각이라면 성공했는지 모르겠군.’
곧 제 목숨도 걱정해야 할 처지가 아니라면 말이다.
전투를 치른 오스만군도 피해가 전혀 없을 순 없어서 천여 명 가까운 사상자가 생겼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대승이다.
“가장 큰 카르틀리가 엄청난 피해를 봤으니 이제 사실상 저항할 세력은 없겠군.”
“이번 전투 결과를 전해 들은 이들은 감히 제국에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항할 정신도 없겠지.”
벌써 여러 도시와 요새에서 반란과 항복 소식이 연이어 들어오고 있었다.
조지아의 멸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던 이들이 대포 한 발을 맞고 현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큰 도시들도 고립되고 있으니,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항복한 귀족들은 파디샤께서 명령하신 대로 처분하고 있습니다.”
항복한 귀족들의 처분은 유수프의 의지대로 가차 없이 이뤄졌다.
오스만 배신에 동조한 자들은 항복했더라도 전부 사형에 처했고, 알고도 방조한 이들은 전부 노예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귀족들이 아무 탈 없이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재산은 몰수됐고, 전부 발칸반도 쪽으로 강제 이주할 예정이었다.
‘뿌리를 잃었으니 더는 귀족이라고 할 수 없지.’
거기다가 이주해서도 살아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외부 왕래가 자주 일어나지 않는 만큼 각 공동체는 폐쇄적이었고, 텃세 때문에 이주민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조지아에서 오랫동안 뿌리내렸던 자들을 전부 치워내는 움직임이었고, 배신에 대한 보복을 톡톡히 한다고 볼 수 있었다.
솀시와 가볍게 향후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파디샤이시여, 체르케스의 사람들이 도착하였습니다.
“들라 해라.”
이미 온다는 소식을 접한 뒤였고,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위대한 파디샤를 뵙습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이반. 고개를 들어도 좋다.”
자신의 명령에 이반이 고개를 들자, 유수프는 빙그레 웃었다.
“주름이 는 것을 보니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노쇠했구나.”
“그만큼 세월이 흐른 탓 아니겠습니다. 처음 뵐 때는 소년이었던 파디샤께서 이젠 거대한 거인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세월이 흐른 만큼 말도 부드럽게 나오는구나.”
한때 떠듬떠듬 오스만어를 내뱉던 이반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유창했다.
얼마나 오스만과 체르케스의 연계를 위하여 노력하였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번 만남이 단순히 인사치레만 위한 게 아닌 만큼 유수프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체르케스가 발 벗고 나온 건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있느냐.”
아무리 체르케스가 오스만 품에 들어왔다고 해도 공을 세웠으면 제대로 보상을 내려야만 했다.
신상필벌은 반드시 제대로 이뤄져야 하는 부분이니까.
이미 사신을 통해 원하는 보상을 생각하라는 지시를 받았던 이반은 살짝 굳은 안색으로 말했다.
“오히려 저희의 움직임으로 트라브존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상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보급을 끊어버리면서 이스마일은 더 격렬하게 공성을 시도했고, 그 끝에 트라브존이 함락 직전까지 갔으니까.
하지만, 유수프는 그걸 탓할 생각이 없었다.
“누가 이스마일이 그런 판단을 내리리라 생각했겠느냐. 너희는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선택을 내렸다. 그리고 전혀 도움이 안 됐던 것도 아니지.”
적어도 공성 병기의 보급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니까.
유수프의 말에 이반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염치불구하고 말하겠습니다. 체르케스의 여인들을 하렘에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재밌는 생각을 냈구나.”
크림 칸국에 납치되어 노예로 하렘에 들어가게 되는 것과는 이야기가 달랐다.
평민 신분으로 들어가 고위 관료들에게 시집보낼 정식 루트가 열리는 꼴이니까.
“한 번 고민해보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파디샤여.”
바로 허락받지 못한 이반은 아쉬움에 한 발자국 물러났고, 다른 것을 물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조지아의 일은 거의 마무리 되었으니, 이제 사파비만 남은 것입니까?”
“그렇다. 그리고 이미 적임자를 보낸 상태지. 아주 유능한 인재더군.”
유수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
“빌어먹을 여길 또 오다니!”
전혀 그립지 않은 땅에서 하산은 절규했다.